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로노스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다. 크로노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올림포스의 신 제우스의 아버지다. 피아노를 배울 때 박자를 맞춰주기 위해서 진자모양으로 좌우로 흔드는 장치를 크로노미터라고 부르는 것도 이 시간의 신 크로노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발에 날개가 달려있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앞이마에만 늘어져 있다. 시간은 기회라는 의미로 통하기도 한다. 머리카락이 앞에만 있어서 기회는 지나가면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튼 시간은 흘러간다. 그것도 앞으로만 달려간다. 아무도 멈출 수 없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간,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철학자는 “시간이란, 질문하지 않을 때는 모두가 잘 아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질문하는 순간 오리무중에 빠져버린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매일 시간에 맞춰 일어나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한다. 시간 약속을 하고 시간 계획을 짠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달이 차면 기운다. 한 달이 가면 월급을 받고 한 해가 가면 나이를 먹는다. 모두가 시간이다. 부모의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알지 못하지만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시간도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시간은 흘러간다. 시계의 초침은 한결같은 속력으로 간다. 시간은 멈출 수도 빨리 가게 할 수도 느리게 가게 할 수도 없다. 시간은 바람이 잔잔하거나 태풍이 오거나 한결같다. 원자폭탄이 터져도 시간은 흘러간다.
최순실 사태가 나거나 말거나 광화문 촛불이 밝거나 말거나 시간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한결같은 시간도 시간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아침 시간 다르고 저녁 시간 다르다. 애인과 만나는 시간 다르고 공부하는 시간이 다르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이기에 이럴까?
어린 아이가 느끼는 시간은 어른의 시간과 같을까? 어린 아이가 무엇을 사 달라고 조르면 대부분 `내일' 사줄게, 라고 말하기 십상이다. 그러면 아이는 지금 사 달라고 조른다. 왜 그럴까? 아이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좀 생각이 다르다. 어른에게 내일은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에게 내일은 먼 미래다. 왜 그럴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인간의 모든 느낌은 경험에서 온다. 시간에 대한 느낌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그 사람의 출생에서 현재까지가 경험의 전부다. 한 살 된 아이의 최대 시간 경험은 1년이고 60세 어른의 최대 시간 경험은 60년이다. 나는 그 두 시간의 느낌은 같을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나는 이것을 “최대경험시간 동등길이 법칙”이라고 이름 지어보았다. 그렇다면, 한살 아이의 하루의 길이는 60세 어른의 60일에 해당한다. 어떤 60세 어른이 아들에게 모자 하나 사달라고 할 때 60일 뒤에 사 드리겠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그만 둬!”라고 화를 낼 것이다. 아이를 탓할 것이 아니라 아이의 시간에 맞는 약속을 해야 한다.
시간의 절대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관찰자의 속도에 따라서, 중력의 세기에 따라서 시간의 길이는 달라진다고 했다. 시간은 존재하는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시간은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사물의 변화를 보고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 바로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다. 30세에는 시속 30킬로, 60세에는 60킬로, 90세에는 90킬로로 달린다고 한다. 시간은 멈출 수 없고 그래서 모든 존재는 사라진다. 로마시대 개선행진에서 개선장군을 따라가며 외치게 했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시간 앞에서 모든 존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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