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불편하지만 인생 3막 준비할 것”
“몸 불편하지만 인생 3막 준비할 것”
  • 김상규 기자
  • 승인 2015.06.24 2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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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정착 여성 참전용사 강영자씨

“내가 에피소드 하나 말해줄게요. 한번은 깜깜한 밤에 뒷간을 가는데 뭐가 머리를 딱 때리는 거예요. 알고보니 짓궂은 위생병들이 날 놀리려고 입구에 끊어진 팔 하나를 매달아 놓은거야. 지금이니까 재밌게 말하는 거지. 비극이죠.”

청주시 상당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강영자씨(82·사진)는 당시를 회상하며 소녀처럼 웃었다.

강씨는 여성 6·25 참전용사 가운데 전국에 2명뿐인 1급 상이자다. 강씨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견인한 8240부대(켈로부대)에서 간호장교로 근무하면서 숱한 부상병들을 돌봤다.

강씨도 야전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다 적군이 쏜 포탄에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맨살이 드러난 강씨의 종아리와 목 아래에는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강씨는 1·4 후퇴 때 아버지 강신저씨와 함께 내려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두 아들이 홍역을 앓고 있어 강씨의 어머니는 고향에 남았다. 강씨는 “그때는 잠시 피신했다가 들어가자 그런 마음이었죠. 잠시 나온다고 그랬던 것이 아버지가 피란생활 중에 갑자기 돌아가시고 고아가 됐잖아”라고 말했다.

갑작스레 전쟁고아가 돼 의지할 곳이 없었던 강씨는 피란생활에서 주민들이 베푼 따뜻한 인심을 지금도 잊지 못했다.

강씨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에 있었는데 통장이 이집저집 돌아가며 밥을 먹이고 소까지 잡아서 대접할 정도로 인심이 좋았다”며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이면 아마 한달도 못살았을 거예요. 지금도 예전처럼 그런 마음의 풍요로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51년 5월 강씨는 미 8군이 내건 여군모집을 보고 꽃다운 18세의 나이에 입대를 결심했다. 강씨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이북에 계신 어머니와 한발짝이라도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새내기 간호사에게 전쟁의 현장은 참혹했다.

강씨는 “여름이면 아무리 야무지게 붕대를 감아도 상처마다 구더기가 들끓어서 환자 모르게 소독하느라 애를 먹었다”며 “의무관이 한명 뿐인데다 약품도 넉넉하지 못해 상처입은 팔이나 다리를 다 이렇게 잘라냈어요”라고 자신의 팔을 비스듬히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어 “사나흘 꼴로 잘린 팔다리를 손수레로 하나 가득 버렸다”며 “나중에 환자들이 `내 다리 내 팔 내놔라'하면서 의무관을 몰매 놨다는 얘길 들었다”고 전했다.

강씨는 대전 미 171육군병원에서 휴전 소식을 들었다.

강씨는 휴전을 앞둔 1953년 3월쯤 여느때와 같이 의무병 2명과 부상병 구조차 연평도 전장에 나갔다가 적 포탄이 쏟아낸 화마에 휩쓸렸다. 강씨는 오른쪽 넓적다리 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하는 등 크고 작은 수술을 9차례나 했지만 걷거나 오래 앉아있기 힘든 몸이 됐다.

강씨는 “휴전소식을 듣고 기가 막혔어요. 몸도 이런데다 고향에도 못 가지. 죽으려고 수면제를 한 움큼 먹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도 내가 치료했던 병사들이 날 알아보고 성심껏 치료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강씨는 지난달 말 전북의 한 종교시설에서 나와 지인의 소개로 청주에 정착했다. 오랜 종교시설 생활에 지친 그녀는 이곳에서 인생 3막을 준비하고 있다.

강씨는 “이 몸으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 농사일도 도와주고 밖에 나가 활동할 계획”이라며 “남은 삶 여기에서 마감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이런 그녀에게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맥아더장군의 퇴임연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김상규기자

sangkyu@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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