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허브를 몇 년째 키우고 있다. 길거리에서 몇 천원에 산 것인데도 생명력이 좋아 죽지 않고 잘 큰다. 향기도 있어 잎사귀를 건드릴 때마다 상쾌한 내음에 기분이 좋다. 물을 거의 주지 않아도 잘 살아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최선의 관상식물인 듯하다.
분양도 꽤 했다. 시집보내 듯 잘라서 주기도 했고, 분갈이를 하면서 떨어낸 것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허브는 공짜지만 화분을 고르거나 옮겨 심는 것은 일이다. 최근에는 간단히 물에 꼽아만 놓아도 잘 산다는 것을 알고 수경재배도 한다. 착하다. 물만 줘도 그리 잘 자라니 말이다.
작은 화분 하나가 이제는 여러 화분이 되어 곳곳에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화분은 나무처럼 굵게 자라나 나름 모양을 갖추어서 분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서생이라는 직업은 혼자서 �:� 앓는 일이 일상이라서 가까이에 있는 생명은 많은 위로가 된다. 전통용법으로 문방사우(文房四友)라며 종이, 붓, 먹, 벼루를 꼽았지만, 현대에서는 오히려 풀이나 나무가 벗이 되지 않을까 싶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에 종이도 사라지는 마당인데, 문방구를 떠들면 젊은이들은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홀로 있는 자신을 �!蠻獵� 어떤 물건은 필요할 텐데, 이왕이면 생명 있는 것이 제격일 듯하다. 생명은 늘 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잘 키우다 보니 좀 더 잘 키우고 싶었다. 마침 농협에서 사은품으로 퇴비를 나누어준다고 하기에 나도 작은 봉지 하나를 얻었다. 화분도 동네에서 몇 개 사고, 배양토도 사고, 그래서 일을 벌였다.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분갈이기에 부담 없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화분 몇 개가 다 썩어 버렸다. 문제는 거름이었다. 자연퇴비라면서 냄새도 안 난다고 적혀 있었고, 흙과 3:1 정도로 섞으라고 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많이 퇴비를 뿌린 모양이었다. 섞기도 귀찮아서 흙 위에 살짝 뿌렸는데, 열기 때문인지 퇴비와 만난 부분이 다 섞어버렸다. 퇴비를 뿌리지 않았던 다른 것들은 모두 멀쩡한데, 새로 산 화분에 퇴비를 뿌렸던 것은 비실비실 죽어버렸다.
그 가운데 썩지 않은 것은 줄기가 나무처럼 딱딱해진 놈뿐이었다. 줄기가 견고해서 퇴비의 열기를 이겨낼 수 있어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거름을 주어야 하나? 좋은 것이라고 많이 주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고,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생물이 퇴비라는 양분이 들어오니 열심히 먹이활동을 해서 그 안에 산소를 다 먹어치워서 그렇단다. 한마디로 산소가 통하지 않아 뿌리가 썩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퇴비는 기본적으로 1년 정도는 묵혀 흙과 같은 색깔이 됐을 때 써야 한단다. 닭똥이 좋다 하더라도 1년을 삭혀 뿌려야 한단다. 새 거름의 열기를 식물이 못 견딘단다.
비싼 난을 죽일 때 가장 많은 실수가 너무 물을 자주 줘서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지나친 관심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모양이다. 거꾸로 꽃을 보고자 하면, 난을 찬 겨울에 밖에 내놓는단다. 난이 생명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번식을 위해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나는 풀을 키우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지나친 거름은 독이 된다는 것을. 사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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