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김예식의 '이야기 天國'
향토사학자 김예식의 '이야기 天國'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08.04 08: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동구(洞口)밖의 천리마(千里馬)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은 조선 영조 때의 영상(領相)이다.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자 장단(長湍)고을 오천으로 낙향을 해서 여생을 즐기고 있었다. 장단은 중국을 내왕하는 사신들의 길목이다. 하루는 이종성이 하인을 불러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어떤 손님이 별안간 이곳까지 찾아옵니까"

그의 아들이 의아해서 물었다.

"유척기(兪拓基)가 올 듯 싶구나."

"그자는 우리와 원수가 졌는데 왜 별안간 우리집엘 찾아 옵니까"

유척기는 노론의 거물이었다. 이종성의 집안은 대대로 소론이니까 두 집안은 정적 사이였다.

"공사(公事)가 급하면 사혐(私嫌)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병풍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대화를 시작했다.

"어찌 내집을 찾아 오셨소"

"변무사(辨誣使)로 연경(嚥京)엘 가는 길이올시다."

"그래요"

"가서 어떻게 변명을 해야 옳을지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당시 조선은 미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조선왕조는 개국후 명(明)을 종주국으로 삼아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명나라에서 이여송을 원수로 한 원병을 보내와 조선을 도왔다. 명이 청에게 망한 후 청을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를 전해들은 청의 건륭제(乾隆帝)는 노발대발했다.

'발칙한 조선국을 당장 토벌하라. 고오얀.'

조선천지가 발칵 뒤집혔다. 이래서 우의정 유척기를 변무사로 파견하게 된 것이었다. "상공께서 좋은 변명 구실을 일러 주십시오."

병풍 뒤에서 유척기는 간청했다.

주인 이종성은 담배를 붙여 물고 느신느신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 이웃에 개가해 온 한 아낙네가 있었습니다. 듣자니 그 아낙네는 해마다 전 남편의 제사를 정성들여 지내고서 그 제삿밥을 손수 내게 들고 옵니다. 저번에도 또 그 제삿밥을 얻어 먹었지요. 헌데 근자에 들리는 말에는 현 남편이 그 제사를 못 지내게 했다는 군요. 아낙네는 남편에게 말했답니다. 사람의 불행이란 모르는 것인데, 만약 내 팔자가 아직 더 기박해서 당신에게 불행이 닥쳐 또 돌아가시고 내 목숨이 살아남는 일이 있을지 뉘 압니까. 그러니까 현 남편은 감복을 하고 계속해서 전 남편의 제사를 지내주라고 했다는군요. 덕택에 나는 내년에도 그 제삿밥을 얻어 먹게 됐어요. 어허허."

유척기는 병풍 뒤에서 이종성에게 넙죽 절을 했다.

"자알 알겠습니다. 진실로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셔서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유척기가 환한 얼굴이 돼서 일어서니까 "명나라 제도 그대로의 우리 금관조복이외다. 알아서 처리하시지요."

연경에 간 유척기는 이종성이 준 금관조복을 당당히 입은 채로 건륭제 앞에 나갔다. 건륭제가 격노한 것은 당연했다.

당황하는 기색없이 이종성이 일러주던 제삿밥 이야기를 예를 들어가며 이치를 설명했다.

"듣고 보니까 네 말도 옳긴 옳구나."

청제는 오히려 감탄했다. "하긴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이라더니 의리마저 굳은 백성이구나. 앞으로는 내 사소한 일은 관여 않을 것이니 그 의리를 지키도록 하라."

건륭황제는 유척기에게 상급(賞給)으로 천리마 한 필까지 내렸다.

유척기는 귀국길에 오천 마을 앞을 지나다가 "청제는 상공께 이 천리마를 보내더이다."

쪽지를 말 갈기에 달아 두고 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