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포청천, 그리고 염치
판관 포청천, 그리고 염치
  •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 승인 2012.11.15 2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중국영화가 큰 인기를 끈 시절이 있었다. 청소년들이 앞다퉈 흉내내기에 바빴던 부르스 리 이소룡 주연의 영화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보더라도 매번 통쾌함 그 자체였다.

그 당시 중국영화는 청소년들에게 폭력성을 부추긴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운 무술실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힘없는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중국영화는 대부분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공식을 기저에 깔고 있다.

중국 드라마 <판관 포청천>은 엄정한 판결로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통쾌함으로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중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면서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중국 드라마 <판관 포청천> 역시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권선징악의 상쾌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중국영화나 드라마에 예전처럼 열광하지 않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영화나 드라마를 주로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에서는 여전히 <판관 포청천>을 주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편성하고 있으나 예전같은 반응은 좀처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과거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살아가는 세대들이나 관심을 가질 뿐 젊은 세대들은 그런 드라마가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식으로 뜨악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정도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사필귀정과 권선징악의 행복한 결말이 지금 사는 세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탓인가.

세태는 중국영화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가리지 않고 그런 뻔한 이야기 구조를 식상해 하고 있다. 아니 사람들은 그런 드라마나 영화 등 꾸며진 이야기에 식상한 정도를 뛰어 넘어 착한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라는 섬뜩한 푸념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염치라는 말이 새삼 회자되고 있다.

염치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데, 이 나라 최고 엘리트가 모여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넘치는 거대 권력 조직 검찰의 능력을 뛰어 넘어 특검까지 동원되는 판에도 끄떡없는 내곡동 사저 주변에서 이 말 ‘염치’가 잇따르고 있다.

교육심리학자들은 정서발달에 대해 분노와 즐거움, 슬픔 등 비교적 강하고 일과성을 지닌 감정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교육심리학자 브르지스(K.M. Bri dges)는 정서발달의 단계를 신생아의 흥분상태에서 우선 불쾌와 쾌가 분화하고, 나아가서 불쾌로부터 차츰 분노, 혐오, 공포, 원망 등의 감정이, 쾌로부터는 우쭐댐, 기쁨이 분화하여 2세쯤 되기까지 기본적인 정서가 출현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어 유아기가 되면 선망이나 실망, 불안, 염치, 희망 등도 출현하고 5세쯤까지는 성인에게서 보이는 거의 모든 정서가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염치가 없다는 것은 정서발달 단계가 아직 채 5살도 못된다는 것과 다름없는데, 지금 우리는 이런 지도자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덩어리에서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 아닌가.

우리는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약자에게는 강하고 돈과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해지는 세상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하며 살고 있다.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에 가까운 명제를 개가 웃을 일쯤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다.

서슬 시퍼런 압수수색 영장은 초가삼간에 대해서만 무소불위의 위엄을 떨칠 뿐, 고관대작이나 화려한 고대광실 앞에서는 그만 그 기세가 쪼그라들고 마는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인정받고 정의는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입만 아플 뿐이니 한탄스럽다.

그렇다면 몰염치나 파렴치같은 말을 적용할 대상이 오직 권력을 가진 지도자뿐인가.

그건 분명히 아니다. 그런 염치없음은 그런 인물을 지도자로 선출한 우리들의 부끄러운 손에도 똑같이 있다.

또 이런 선택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는 투표하는 사람들은 모두 2세 이상의 정서발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