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추억과 반려동물의 신세
앵무새 추억과 반려동물의 신세
  • 김성식 기자
  • 승인 2012.07.23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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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기자의 생태풍자
김성식 생태전문기자<프리랜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7년(1407년) 6월 15일 내사 김득과 김수가 명 황제가 준 앵무새 3쌍을 가지고 돌아왔고 이에 6월 28일 남성군 홍서를 보내 앵무새 준 것을 사례하고 순백지 8천 장을 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세조 13년(1467년) 3월 5일엔 유구국왕이 사신을 보내와 앵무새를 바쳤으며 7월 13일에도 앵무새, 큰닭, 서각 등을 바쳤다. 유구국은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왕국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앵무새는 이미 조선초에 한반도에 유입됐으며 나라간 선물 혹은 공물로 보내질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앵무새는 대부분 남미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가 원산인 만큼 당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류도 한두 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종 4년(1911년, 부록) 10월 10일 기사에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황모자앵무 1수를 바쳤다. 또 왕비에게는 작은 새장을, 덕수궁에는 태백앵무 1수를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왕실에 들여와진 앵무새들은 특유의 아름다움과 울음소리를 지닌 관상조로서의 역할 외에도 '참으로 황당한' 기능을 떠맡았으니 그것이 바로 궁녀의 처녀감별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궁녀들은 입궁하려면 가장 먼저 몸의 순결 여부를 판정받아야 했는데 이 때 이용된 게 앵무새 피였다. 의녀는 앵무새 피를 궁녀 후보아이 팔목에 묻혀 그대로 잘 묻으면 처녀라고 판정해 입궁을 허락한 반면 잘 묻지 않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판정해 되돌려 보냈다.

한 아이 혹은 한 집안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사를 외래 관상조의 피를 가지고, 그것도 전혀 입증되지 않은 미신과도 같은 방법으로 결정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측은함 마저 인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팔뚝을 걷어 내밀고는 차갑게 떨궈진 핏방울을 바라보며 그것이 흘러내릴지 아닐지 가슴 졸였을 그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궁궐사의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니 말이다.

일부에선 앵무새가 남녀간의 사랑, 가족간의 화목을 상징하는 새이기에 궁녀의 팔목에 그 피가 잘 묻지 않으면 장차 궁궐내에 불길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로 해석해 그런 풍습이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기야 임금 눈에 들기만 하면 졸지에 후비가 될 수 있었던 게 당시 궁녀들 아니었던가.

필자는 앵무새와 관련해 생각할수록 황당한 경험을 한 적 있다. 중학교 1~2학년 때쯤의 일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방죽으로 물놀이 가던 길이었는데 한 외딴집 근처에서 웬 앵무새 1마리가 참새무리에 섞여 놀고 있지 않은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우리나라 야생에서 앵무새가 놀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호기심은 이내 어린 마음을 부추겼고 결국 한두 시간 쫓아다닌 끝에 그 앵무새를 붙잡아 겨울 직전까지 기른 바 있다.

여름 휴가철이 되면서 피서지에 각종 반려동물을 데려 갔다가 몰래 버리고 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반려동물의 대표격인 개는 물론 거북과 뱀, 도마뱀 같은 파충류와 심지어 고슴도치, 햄스터, 토끼, 기니피그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더구나 개의 경우 집을 아예 못 찾아오도록 가능한 한 먼 곳에 버려지고 있으니 세상 참 매정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외래 동물들이 유입되고 있고 또 많은 동물들이 버려지거나 영역을 이탈해 떠돌고 있다. 그중 대다수는 반려동물이다. 이름이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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