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 귀천은 있다
직업에 귀천은 있다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6.06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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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직업에 귀천은 없다"라는 말을 사실 그대로 믿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천 개나 되는 직업 중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이 희망하는 직업은 뭉뚱그려도 채 20여 개를 넘지 않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의뢰해 진로진학상담교사가 배치된 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2011년 학교 진로교육 현황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교사(11%), 공무원(4.2%), 경찰관(4.1%), 간호사(3.9%), 회사원(3.6%), 기업 CEO(3.4%), 의사(3.2%), 요리사(2.3%), 사회복지사(2.2%), 생명과학연구원(2.0%) 등 순으로 나타났다. 학부모가 선호하는 직업 또한 학생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공무원(17.8%), 교사(16.9%), 의사(6.8%), 간호사(4.8%), 자녀의견 우선(4.4%), 경찰관(3.7%), 회사원(2.9%), 판·검사(2.0%), 직업군인(1.9%), 한의사(1.7%) 등으로 순위에는 차이가 약간 있으나 직업군은 대동소이한 결과를 보였다.

소질과 적성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한 것이 눈에 띈다. 고용불안의 파고가 꿈을 먹고 사는 청소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학생들이 선택한 직업에 용접공, 택시기사 등 고된 일을 하는 직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늘 상위를 차지하던 연예인이 없는 것을 보아 대학진학과 취업을 앞둔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현실적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 잘 짜진 톱니바퀴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이 세상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당장 집 앞 쓰레기를 치워주는 환경미화원이 하루 파업만 해도 지저분함과 역겨운 냄새에 모두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데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우리 사회에 800만 명의 비정규직이 있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희망 직업을 제외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나온 젊은 사람이 비정규직에 속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그들을 정규직화 하려는 노력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끔 택시를 타면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택시기사의 현실을 묻는다. 개인적으로 창원에서 택시 영업을 하는 형님 덕에 택시기사에 애착을 갖는 면도 있다. 옛날에는 기본요금을 받으면 커피 석 잔 정도 마실 정도는 되었다며 각광받는 직업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과거를 추억하는 기사의 이야기도 듣고, 자신은 도급제 기사라며 하루 18시간 일해서 100만원 남�!� 수입금을 가져간다는 고달픈 삶을 스스럼없이 토해 내는 기사도 자주 본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간판이 서너 차례 바뀌는 식당들과 일자리를 얻지 못해 도서관을 오가는 청년 실업자들의 모습은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라는 말에 선뜻 동의가 되질 않는다. 억대의 CF를 찍는 연예인도 아침 방송에 나와 만원짜리 한 장 들고 시장에 가면 살 것이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으며 서민들 걱정을 하는 모습과 월 1000만원 이상의 세비를 받는 국회의원이 서민의 장바구니를 걱정하며 말을 들을 때면 배신감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직업이 귀한 직업이고 최저임금을 받으며 고용불안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직업이 천한 직업이다. 최저 시급 4580원에 젊음을 저당잡힌 편의점 일도 천한 직업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은 없는 사람을 위무(慰撫)하는 가증스런 말이다.

월수입이 높은 가정의 학생이 학력수준이 높다는 사실은 그러한 귀천의 시작이 이미 학교에서부터 고착화 되고 사회에서 확대 재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밤늦도록 운전대를 잡아도 자녀를 학원에도 보낼 수 없다는 어느 택시기사의 푸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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