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정규호 부국장(취재2팀장)다음주 월요일인 1월 30일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특별히 기억할 만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이날, 백의의 천사로 일컬어지는 이 땅의 딸 128명이 통일되기 전 독일인 서독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보다 전에 이미 일부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에 진출했으나, 정부 차원에서 외화벌이를 위해 공식적으로 간호사를 해외에 파견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환송 온 가족들과 눈물로 헤어진 이들 대한의 딸들은 그야말로 악착같이 일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당시 서독 언론들이 이들을 '코리아니쉐 엥겔(한국의 천사들)'로 부르며 극찬하기도 했다.
일제강점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한국전쟁을 겪고 또 4·19와 5·16이라는 격동을 치르면서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 놀랍게도 이들 간호사 신분의 딸들은 '3년간 한국에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급여의 일정액을 반드시 송금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해야만 서독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우리 경제의 험난한 시작은 이렇게 여성의 힘이 큰 발판이 됐다.
삼단 같은 긴 머리를 곱게 따 내려 맵시를 자랑하던 이 땅 여인들의 머리채는 듬성듬성 잘려 엿장수 가위질에 팔려갔고, 그렇게 가발 수출이 시작된 것은 1964년.
먹을 것도, 만들 수 있는 능력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가난한 나라의 서러움은 딸들의, 그리고 여인들의 머리카락이 가발로 둔갑하면서 1만4000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이 불과 1년만에 155만달러로 널뛰듯 했으니, 여성의 힘은 차라리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이랴. 어떤 일이 있어도 남동생만은 가르쳐야 한다는 남존여비의 기막힌 현실에도 피 울음을 참아가며 누나들은 서울 남의 집으로 식모살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공순이라는 비아냥거림에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밤새워 미싱을 돌려대던 이들도 자랑스러운 이 땅의 여인네들 아니던가.
여성취업자 1000만명의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이다. 기획재정부와 통계청은 지난해 우리나라 여성 취업자가 1009만1000명으로 발표했다. 지난해 보다 17만700명이 늘어난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여성인구의 증가 효과와 보육시설 확충으로 인한 보육부담의 감소가 여성들의 일 욕구를 늘어나게 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일견 맞는 말일게다. 그러나 1963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 처음으로 50대 여성 취업자가 20대 여성보다 많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잘라야만 하는 서러움의 시대는 아닐지라도, 그리고 보육시설의 증가로 자식들에게 갈 손길이 한가해 졌다 해도 여성들의 일 욕구가 늘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어쩐지 부담스럽다.
그 이면에는 보육비를 포함한 자녀 교육에 드는 비용의 부담스러움이 심화되거나, 아니면 이제 자식도 믿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식들에 의지하지 않고 노후를 불안하지 않게 보내겠다는 발버둥은 아닌지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더군다나 1000만이 넘는 여성 취업자 가운데 과연 고학력일지라도 전문성을 지켜가며 일을 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 것이며, 또 그녀들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 낸 당당한 주역임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는 사회인지 묻고 싶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말 그대로 일 의욕만큼 불안하지 않은 고용형태가 보장되고 있는지, 그리고 가정은 그녀들이 일하는 만큼 가사분담은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우선돼야 하는 건 아닌가.
지금은 남성들만의 힘으로 버텨내기가 쉽지 않은 세상. 그 세상의 고단함이 다시 여성들을 일터로 불러내고 있으며, 그녀들에게 다시 속절없이 기댈 수밖에 없는 수상한 계절.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막론하고 즐거워야 하는데 자꾸만 '부러진 화살'이 떠오르는 까닭은 무언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세상, 그 철저한 철옹성이 그녀들을 힘겹게 하는 건 아닌지 다시 여성의 힘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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