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손바닥 만한 소설
설날, 손바닥 만한 소설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2.01.20 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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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부국장(취재2팀장)

할머니는 그때가 되면 늘 그렇듯이 평생을 고집해 온 쪽진 머리를 참빗으로 빗어 넘기고 은색 비녀를 정성스럽게 꽂았다.

옥색 치마저고리와 마고자까지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는 해거름이 채 되기 전부터 문풍지 펄럭이는 방문을 여러차례 여닫으며 목이 빠져라 바깥을 살피고 있다.

입술이 마르는지도 모르는 채 이제나저제나 할머니를 지루한 기다림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오늘이 설날을 하루 앞둔 날이기 때문이다.

5남매나 되는 자식을 잘 키운 할머니는 자신과 같이 홀로 남아 어느덧 늙은 티가 흐르는 며느리와 단둘이 살고 있다.

장성한 자식들은 이 도시 저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먹고살기에 바쁘고, 오롯이 의지하려던 장손인 큰 손자 역시 명절이나 생일, 그리고 이따금씩 거르기는 해도 그나마 여름휴가나 돼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립다.

팍팍한 자신의 가슴에 증손자를 안긴 큰 손자는 보면 볼수록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그 녀석이 코를 찔찔 흘리던 어린 시절만 해도 할머니는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일찌감치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해야 했던 그 녀석은 이따금씩 할머니를 만날 때면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때문에 할머니는 녀석이 시골집에 오는 방학 때며, 명절을 앞두고는 여기저기 이웃집을 더듬으며 이야기 동냥을 해야 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는 걸 눈치 챈 꼬마 녀석이 슬슬 싫증을 내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근동에서는 입담이 가장 좋기로 소문난 이웃 아낙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받아주고 전해 들은 이야기를 행여 잊어버릴까 조바심하면서 가만가만 들려주는 이야기에 초롱초롱 눈빛을 맞추는 손자는 이제 없다. 아니 그 손자는 벌써 자식 둘을 거느린 장성한 몸으로 있되 정작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은 없는 눈치다.

그렇다고 증손자며, 아직 채 자라지 못한 손자 녀석들도 이제 더 이상 할머니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식솔들은 잔뜩 모여들어 집안은 북적거리지만 그 소란스러움이 할머니에겐 더욱 쓸쓸하다.

지금은 그런 외로움이 더 사무친다. 지난해 설날 손자 한 녀석이 손바닥만 한 기계를 들고 와 자랑하더니, 올해는 열명이 넘는 손자 녀석들 손마다 그 기계가 들려 있다.

오래된 나무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할머니- 하면서 길고 반갑게 외치는 목소리가 반갑다는 표현의 전부. 삐금 얼굴을 디밀고 인사를 하기 바쁘게 건넌방으로 몰려가더니 손바닥만 한 기계에 얼굴을 처박고 도대체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관심조차 없다.

할머니는 그 손바닥만 한 기계에 도대체 무슨 꿀단지라도 들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 기계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들끼리도 별다른 대화가 없는 듯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그 기계를 통해 글자로 이야기를 나눈다나.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밤늦은 시각.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진 건넌방에는 분명 손자들 여러명이 자리를 잡았는데, 도대체 이야기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방문을 열어보니 한 녀석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모두 고개를 떨군 채 그 손바닥만 한 기계를 들여다보며 삼매경에 빠져 있다.

물론 할머니도 그 기계가 자식들에겐 편리하고 고마운 존재임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온 나라가 들썩일 만큼 고향을 찾느라 도로는 온통 자동차로 넘쳐 나는데, 그 기계가 알려준 대로 길을 택해 왔더니 조금 일찍 도착했다는 장손의 말마따나 자식들 고생 덜 시켰으면 됐지 더 뭘 바라겠는가.

조금 전만 해도 그 기계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것 아닌가 서러웠던 할머니는 그런 위안으로 설을 맞기로 했다.

그런데도 그 손바닥만 한 기계에 정신이 빠져 옛날이야기는 고사하고 손자들 주려고 며느리 몰래 감춰 두었던 곶감이며, 달콤한 옥단춘마저 거들떠보지 않는 손자들에게 서운한 마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새해 첫날 첫닭이 울기까지 잠을 설친 할머니는 아무래도 그 손바닥만 한 기계가 밉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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