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신문에서 친구들로부터 당한 왕따나 폭력피해 사례를 적나라하게 적은 피해학생의 일기장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아이들이 같은 반 친구에게 이다지도 잔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동안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안으로 곪고 멍이 들었을 피해학생의 모습에 어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눈만 뜨면 터지는 학교폭력과 자살하는 청소년의 이야기는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학교폭력의 원인을 교권의 추락에 있다고 지적하는 것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다. 학생들을 통제할 수단이 없어 방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학교폭력의 원인을 오로지 학생중심의 인권 강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학생의 인권신장이 학교폭력의 증가와 비례한다는 식의 일방적인 논리는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학생을 통제할 수 있는 교사의 재량권이 없어서 이처럼 심각한 사태를 야기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는 교사에게 체벌권과 퇴학처분 등 강력한 처벌권을 주면 학교폭력은 사라질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학교폭력을 교사들이 합법적 폭력의 권한을 부여받아 해결하겠다는 발상과도 같다. 과연 그럴까 과거 학생 인권이 현재처럼 강조되지 않았을 때도 학교폭력은 존재했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 피해학생도 분명히 있었다. 학교폭력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인성교육보다는 입시위주의 학사운영과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인한 자녀와의 소통 부재, 폭력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 등. 그럼에도 대증요법(對症療法)처럼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치료하려는 안일한 사고는 임시방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학교폭력을 막는 근본적 대안은 될 수 없다.
스쿨폴리스 제도를 만들고, 학생기록부에 가해 학생의 처벌기록을 기재한다면 일시적인 폭력행위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폭력을 감시하고 처벌을 강화한다는 것은 학생들을 잠재적인 폭력집단으로 매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의 심각성은 몇몇 학생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학생도 암묵적으로 폭력의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폭력에 쉽게 노출되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교육은 가해학생과 피해학생 모두를 아우르는 정책으로 나가야 한다. 퇴학처분과 전학으로 학교로부터 격리당한 학생과 학생기록부에 처벌기록을 기재해 사회적 낙인을 받게 받은 학생들의 대책을 마련하는 것 또한 사회적 책무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의 인권을 담보로 교권을 침해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수정하지 않고는 학교폭력에 대한 근본적 해결은 요원하다. 학생인권조례는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가져야 하고, 가진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헌법 제9조에 명시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는 대전제에 출발하는 것이다. 인권의 기본핵심은 '상호존중'이다. 내 인권을 존중받기 위해선 상대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한다.
보수언론에서는 연일 학교폭력에 대한 실상을 처음 알았다는 듯이 피해사례를 도배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폭력은 전부터 있었고 진행형이라는 것은 모르는 일선 교사들은 없다. 학생인권조례제정과 맞물려 마치 학생인권조례제정이 학교폭력의 단초가 된 양 보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오히려 인권교육을 강화해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봐온 학생의 인권이 왜 중요한지와 인권 침해 실상과 '배려와 존중'의 기본정신을 가르쳐야 한다. 어떠한 권리도 '인권' 위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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