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의 큰 뫼 - 세상의 빛으로 영원하리
육영의 큰 뫼 - 세상의 빛으로 영원하리
  • 박영수(수필가·딩아돌하문예원 이사장)
  • 승인 2011.12.04 2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석우 김준철 박사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석우 김준철 박사님, 어찌 이리도 황망히 길을 재촉하셨습니까. 내일 모레면 졸수(卒壽)이신데, 그 고갯마루 넘기가 힘드시던가요.

2011년 12월 2일, 청주 우암산 기슭에 민족사학의 불을 밝히던 큰 별이 떨어지니, 칠흙 같은 새벽하늘에 흩날리는 빗방울이 청석인(淸錫人)의 애절한 눈물인 양 마른 대지를 적십니다.

이제 찌렁찌렁하던 '천상의 목소리' 그 음성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것입니까. "옳지, 옳지!", "그래 맞아" 하는 절창의 추임새도, 닫힌 마음조차 활짝 열게 하던 특유의 너털웃음도 전설이 되고 만 것입니까.

관용과 인내, 성숙한 지도자의 품도를 지닌 인생의 스승을 이제 우리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회자정리(會者定離)란 세상 이치가 참으로 야속하기만 합니다.

1923년 충남 조치원에서 석정 선생의 6형제 중 막내로 출생한 박사님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청주 큰집(청암 선생)으로 보내져,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으나, 가락 수로왕 71세손 판서공파의 집안에 복덩이가 분명했나 봅니다.

막둥이가 무럭무럭 커 갈수록 아버님 형제분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전국의 상권을 주름잡는 거상(巨商)으로 떠올랐고, 1924년 개교한 대성보통학교가 청주상업의 설립으로 이어져 민족사학의 기틀이 다져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큰댁으로 출계(出系)한 직후인 약관 26세에 재단 참사직을 맡아 육영인생이란 험난한 영광의 길에 들어선 박사님은 마침내 42세에 창업에 이은 수성(守成)의 막중한 책임을 걸머진 제2대 이사장을 맡게 됩니다.

이때 아버님의 지엄한 당부를 받아들인 심경을 지인에게 토로한 한마디가 가슴에 닿습니다.

"어떡햐, 운명인 걸…." 너무도 절묘한 이 한마디에는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꿈꾸던 입신양명의 길을 모두 접고 평생을 오직 '인재양성'이라는 험로를 택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주어진 '운명'은 육영의 새 역사를 일구어냈습니다.

영정 앞에 서고 보니 '교육구국'의 씨앗을 '실학성세'로 꽃피우고자 했던 박사님의 육영철학을 지근거리에서 모셔왔던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부족하고 아둔한 탓에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여 폐만 끼쳐드렸다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굽니다.

돌이켜보면 교단 초년병(대성여중)이던 저를 불러주신 것이 이사장 취임 직후인 66년 봄이었죠. 이상록 기획실장 휘하에서 공보기획업무를 맡아 대성학원보, 청암선생 추모사업(전기발간, 영화제작), 학원사 편찬 등의 실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이후 99년 대학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박사님을 직·간접적으로 보필하며, 꾸중도 참으로 많이 들었으나 지금에 생각하면 즐겁고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창업이 어렵지만 수성(守成)은 더욱 어려운 일이던가요.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난관을 이곳에 어찌 담을 수 있을까만, 오늘날 우암산 기슭에 세계적 규모의 대학캠퍼스가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 이분의 높은 비전과 안목, 불굴의 집념, 추진력의 결정체라 함은 결코 반복도 과장도 아닌 진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당신께서 지극한 효심으로 선친 형제분 선양에 몰두하여 그늘에 가려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석우 박사님의 육영철학과 사회봉사 활동은 앞으로 심도 있게 재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90평생을 인재양성과 다양한 사회활동에 바치신 석우 박사님은 후사준비에도 만전을 기하셨습니다. 3대(윤배 총장)로 이어지는 육영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으니 '아름다운 마무리' 아니겠습니까.

석우 박사님, 우암산 기슭에 이는 바람으로 너털웃음 끝없이 날려 주소서. 육영의 큰 뫼로 영원히 세상의 빛 되소서. 편안한 명부의 복 누리옵소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