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반숭례 <수필가>완연한 봄기운이 도는 토요일 오후다. 마당 구석구석과 화단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을 긁어모으다 보니 그 속에서 뾰족하게 여린 새싹이 봄을 깨우고 있다. 쪽빛하늘 언저리 하얀 구름은 바람을 앞세워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을 간지럽힌다.
봄날에 부는 미풍에만 청아하고 맑은 소리로 울리는 풍경은 봄볕에 그리움이 한 뼘씩 자라나는 막내 동생의 목소리다. 그는 수도원에 살고 있다. 휴가차 집에 왔을 때 사십년이 지나도록 속리산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기에 구경 갔다가 '풍경이 울면 언니가 그리워 찾아 온 것' 이라며 내게 선물로 사 준 것을 방 창문 가까이 처마 끝에 매달아 뒀다. 강풍과 샛바람이 지나도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다가 미풍에만 '언니'를 부른다.
앞마당 화단에는 꽃씨를 해마다 뿌린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 꽃씨 받기가 쉽지 않다. 늦가을에 꽃씨를 받아 봄에 씨를 뿌려도 뿌린 씨만큼 꽃구경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씨앗 중 일부는 남겨두고 꽃씨가 땅속에서 발아하여 새싹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가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관심과 사랑은 사람뿐만 아니라 작은 꽃들에게도 필요하다. 꽃씨만 뿌려놓고 방심하는 것은 금물이다. 씨를 뿌려서 꽃을 보는 맨드라미나 백일홍 봉선화 금송화 깨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내가 원하는 만큼 감상하려면 먼저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 가꿔야 한다.
바람과 씨앗들은 떨어질 수 없는 영원한 동반자이다.
바람은 마당의 빈터를 남겨두지 않는다. 온갖 잡초들의 씨앗들을 달고 지난 늦가을까지 빈터로 데려다 주어 마당가 돌 틈 사이 민들레, 뜨락 아래 양지꽃 제비꽃 올봄엔 새싹들이 여기저기서 쏙 쏘옥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어린시절 동네아이들과 숨바꼭질하던 모습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모두 다르다.
나뭇가지 위에 올라갔다가 곤두박질로 떨어지면 비바람이 몰려오니 열어놓은 장독뚜껑 닫으라는 엄마 목소리이고, 흙먼지 날리며 골목을 휘집고 돌아다니는 것은 황사바람이 불고 있다는 장난꾸러기들의 외침이다.
솔솔 부는 미풍에 모아놓은 낙엽들이 흩어지며 대문 옆 담장가로 몰려간다. 빗자루를 들고 쫓아가보니 연보랏빛 개불알 풀꽃이 양지바른 담장 아래 모여 허연 이를 드러 내놓고 나를 반긴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잎줄기가 옆으로 퍼지며 꽃이 피는 개불알 풀꽃은 우뚝 선 가지 밑 부분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져 비스듬히 누워 퍼지며 자란다. 그런데 얼마 전 인천 동생 집에서 다섯 자매가 모여 언니를 가운데 눕혀놓고 이야기 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청각이 약한 언니 겨드랑이 옆에 눕거나 앉아서 재잘거리며 떠들고 웃는 동생들 표정만 보며 빙그레 웃다가 잠이 들고 또 웃는 소리에 눈을 뜨고 하시는 언니는 동생들의 애환과 기쁨을 늘 함께해 주시는데, 우뚝 선 가지 옆 겨드랑이에서 가지가 퍼지며 꽃을 피우는 개불알 풀꽃의 모습이 우리 언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을 남보다 제일 먼저 알려주는 개불알 풀꽃이 활짝 웃고 있다. 그립다. 그립다.
봄 햇살을 흠뻑 마시며 길게 누운 한낮 사이사이를 넘나들던 미풍이 내 무릎 위에 올라와 살짝 앉는다. 멀리 있는 동생에게 봄소식을,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또 보고 싶은 언니에게 안부를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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