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차한 명분 찾기
구차한 명분 찾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09.03.17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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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혁두 부국장 <영동>

쿠데타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정권을 장악한 보카사는 1977년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수도 방기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나폴레옹이 착용했던 것과 같은 왕관과 모자, 신발을 파리에서 주문하는 등 이 희대의 코미디에 들어간 비용은 이 나라 1년 예산의 절반인 2억달러였다. 취재하던 서방의 기자들이 물었다. "국민들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데 너무 과한 지출 아니냐." 이때 보카사의 입에서 기가막힌 명언이 튀어나온다. "희생없이는 역사가 이뤄지지 않는 법이요." 기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국민의 고혈을 짜내 호화판 잔치를 벌이는 독재자의 이 궤변은 국민들에게 더한 절망과 분노를 안겼다.

"뒷산의 황률(누런 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벌어지는 법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그제 재보선 불출마 발표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대체로 자꾸 재촉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의중을 밝히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던 모양이다. 아직 도모할 때가 아니니 더 기다리겠다는 불출마 입장을 애두른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 말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의 일화에 등장하는 시구다. 後園黃栗不蜂坼, 溪邊楊柳不雨長이 원문이다.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벌어지고 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란다는 뜻이다. 김삿갓이 방사를 치른 한 처자를 지면에 소개하기조차 민망할 정도의 외설적인 표현으로 공박하자, 이 여인이 즉석에서 한시를 지어 김삿갓의 트집을 일축한 것이다. 남자를 경험하지 않더라도 여인의 몸은 때가 되면 성숙해지는 법인데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반박이 담겨 있다.

박 대표가 재보선 출마를 포기한 이유는 하나다. 승리를 확신할 수 없어서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간평가로까지 상징성이 커져버린 보선에서 그가 질 경우 받을 타격은 자명하다. 더구나 야당에서도 비슷한 체급의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이 출사표를 던진 상황이다. 그가 텃밭인 전주에서 공천을 받으면 당선은 떼어 논 당상이다. 양당의 간판들이 나서는 보선에서 정 전 장관은 이기고 자신은 패할 경우 재보선 패전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 써야할 상황이 된다. 정치생명까지 걸면서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장고는 판세와 승산에 대한 저울질이었다.

구차한 과정을 거친 자신의 결정을 '뒷산의 밤나무'나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기 위해서' 등의 엉뚱한 구실로 각색한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국민의 관심사가 됐던 자신의 정치적 거취를 밝히는 자리에서 침실에서 남녀간에 오갔을 법한 시구를 동원한 것이 적절했는지도 따져볼 문제다. 그냥 "출마하지 않는 것이 당에 유리할 것 같아서"라고 하면 됐을 것이다. 이런 저런 사족을 달며 무슨 중대한 결단이라도 내린 것처럼 스스로를 연출하는 행태는 더 군색해 보인다.

기자들의 질문에 자칭 황제인 보카사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 그럴 듯한 변명을 찾다가 '역사는 희생을 담보로 한다'는 황당한 대꾸를 내뱉었을 것이다. 쓸데없이 입을 놀려 국민들의 화를 더 돋운 셈이다.

솔직해질 자신이 없으면 입을 닫거나 말을 줄이는 것이 정석이다.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명분을 찾다보면 주변을 짜증나게 하는 궤변이 생산되기 마련이다. 특히 우리네 정치인들이 그렇다. 박 대표의 발언이 미치광이 독재자인 보카사의 망언과 비교된 것 같아 미안하지만 정치인들의 엉뚱한 수사에 짜증을 내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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