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농사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23 22: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심천
이 영 창 수필가

날더러 배추하면 내놓으라는 사람이라 해서 멋쩍었던 일이 있다. 어느 해 비닐하우스에 배추를 심었는데 남들이 모두 무름병으로 낭패를 당했어도 나만은 살아남아 집을 마련하는, 행운을 잡은 일이 있다. 그것은 결핵환자들에게 사용하는 스트렙토마이신 주사약 덕이었다. 처방약이 한두 가지 있지만 그해는 백약이 무효였다.

언제나 정부는 풍년을 노래하지만 풍년은 농민의 몫이 아니다. 흉년을 이겨낸 농군만이 살아남는다.

어느 해 감자 11가마니로 묘를 길러 1500평이 넘는 감자농사를 지은 적이 있다. 물론 감자재배도 질소, 인산, 가리 삼요소가 모두 필요하지만 유기질비료(퇴비)와 질소비료가 가장 필요한 성분이다. 그때의 형편은 그 면적에 퇴비나 질소비료를 대기가 어려웠다. 생각한 것이 겨울동안 밭에 인분(人糞)을 뿌리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반 정도밖에 뿌리지 못하고 남는 면적은 비료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확기가 되어 거둔 결과 인분을 사용한 곳의 수확량이 월등했다. 하지만 인근 들판은 인분냄새가 진동하여 오가는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러한 농사는 잠시였고 공무원에 입문하여 도서관에 근무하게 되었고 그 직에서 퇴직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열람지도를 맡았던 일이 있다. 그때 어떤 학생 하나가 열람실 가까이서 심하게 장난하고 떠들기에 야단을 쳤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보고 있던 그 아버지가 다가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심하게 내게 항의했다. '내 자식 기죽게 왜 야단치느냐'는 것이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공무원이 열람자에게 대항하는 것 같아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자유와 민주주의는 비위에 맞지 않았다. 잘못된 생각일까 요즈음 사회나 기업, 가정도 잘못된 평등, 기본적 인권의 남용으로 부모나 관리자, 감독자가 젊은이를 꾸짖지 않는다.

학교에서 선생이 학생의 머리에 꿀밤을 하나 먹이기만 해도 극성스러운 어머니들이 인권유린이라 소동을 벌리고 촐랑대는 신문기자들도 덩달아 떠들어대는 세상이니까.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치켜세우고 점수를 따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화가 난다.

사회에서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대학교수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학생들에게는 사물에 대한 이해가 빠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주제에 대학분쟁에서는 감금되거나 변명서를 써주는 등 칠칠치 못한 경우다. 말하자면 시국편승주의 말이다. 기업도 그렇다. 젊은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젊은이를 애지중지만 한다

이런 말이 있다. '1년을 기르려면 식물을 기르고 10년을 기르려면 나무를 길러라. 백년 걸려 기르려거든 사람을 기르라' 인재교육이란 그렇게 즉석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인분비료라도 줘야 한다. 온실에서 재배된 야채나 과실은 보기에 좋은 것 같아도 자연 풍설을 견뎌낸 것보다 분명히 맛이 못하다. 교육이란 민주주의를 빌려 애지중지만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엄하고 어렵게 자란 아이가 부모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바로 성장하여 큰사람이 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