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교
향 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8.07 2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감체험 문화답사기
한 윤 경 <역사논술 지도교사>

옛날 옛날의 학교

공부로 쉴 틈이 없었던 친구들, 여름방학을 맞아 한번 실컷 놀아보고 싶은데 밀린 보충학습과 다음 학기 예습으로 학원을 순례해야하는 방학이 없는 방학을 보내고 있지요. 대신 학생들로 왁자지껄하던 곳곳의 학교가 조용한 방학을 맞아 잘 지내고 있어요.

청주는 일찍이 교육의 도시로 유명하지요. 도시의 규모에 비해 학교가 많기도 하지만 오래전에 중요한 교육기관이 청주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증거는 고려 초 광종 때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에 있어요. 이 당간의 아래서 셋째 층에는 신라 때의 교육기관장이였던 '학원경', '학원낭중' 등이 우리고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물론 이런 교육기관은 모두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요. 하지만 조선시대 세워진 청주 향교가 우리고장의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으로 남아 그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어요.

향교는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교육 중심이 되어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죠. 시골에 있는 문묘와 거기에 부속된 학교로 지방재정으로 운영했던 지금의 공립학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향학, 학관, 재관, 또는 교관으로도 불렸어요.

고려 성종 때 전국에 12목에 학교를 설치하여 경학박사를 배치하고 각 지방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면서 시작이 되었는데, 청주도 당시 12목의 하나였으므로 당시 학교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어요. 오늘의 청주 향교는 조선 태조 7년 각 지방에 360개의 향교를 세우고 고등학교의 기능으로 인재양성을 했을 때 세운 것이라 전해집니다.

세종 26년(1444년)에는 세종께서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맑은 물로 유명한 초정에 행차하셨다가 서적을 하사하신 일도 있었구요, 세조 10년(1464년)에는 세조가 문묘에 친히 제향을 한 일도 있지요. 이처럼 왕이 특별한 배려를 했다는 것은 청주 향교가 삼남(전라, 경상, 충청)의 제일의 향교였음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충청북도청의 동쪽 담장을 따라 중앙초등학교 뒤편에 '청주향교' 표지판이 있어요. 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인 우암산 쪽으로 걷다 보면 향교가 보이죠. 입구에는 홍살문과 함께 누구나 말에서 내려야 하는 하마비가 있어요. 경건한 자세로 외삼문의 오른쪽 계단으로 한발 한발 오르면 유생들의 교육을 위한 교실이었던 명륜당이 모습을 보입니다. 그 뒤로 내삼문을 지나면 오성위(공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와 송조육현, 그리고 우리나라 십팔현의 위패를 모셔놓은 대성전이 나타나지요. 이곳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성현을 기리는 석전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앞마당은 전통혼례식장으로 쓰고 있어요.

중요한 교육시설이던 향교는 조선후기 서서히 제 기능을 잃어가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국가 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병탄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지방 향교를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면서 문묘의 역할만 남게 됐어요.

하지만 현재는 서예, 한문, 전통예절을 교육하며 다시 교육의 장으로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으며, 글짓기, 충효 웅변대회, 예절상담, 전통혼례 등을 하며 우리 고유의 전통을 면면이 이어가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