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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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절판된 책을 인터넷 중고거래를 통해 어렵사리 구했다. 출간된 지 3년이 갓 넘은 이 책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가 절판된 이유는 판권문제로 알고 있다.

“그 값이 숨겨져 있어 저렴해 보이지만 실은 저렴하지 않은 것들 - 자연, 돈,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생명-이 저렴해지기까지 지구가 그리고 인류사회가 치러야 했던 값” 책 맨 앞에 있는 제현주(임팩트 투자회사 엘로우독 대표)의 추천의 글에서 호국 영령을 떠오르는 일이 생뚱맞지 않다고 믿는다.

해마다 현충일을 맞으면 빠짐없이 대전 현충원을 찾는다. 남다르게 투철한 보훈정신이 있는 건 아니다. 결혼으로 인연이 만들어진 장인어른이 그곳에 잠들어 계시기 때문이다. 장인어른은 생전에 화랑무공훈장을 받으셨다. 엊그제 돌아가신 것 같은데 어느새 빈자리가 없으니, 현충원을 다녀올 때마다 끝나지 않은 조국의 전쟁을 실감하게 된다.

텍사스 대학 공공정책대학원(LBJ School) 연구교수, 남아프리카공화국 로드 대학 인문학 선임연구원 라즈 파텔과 미국 빙엄턴 대학 사회학과 교수 제이슨 무어의 공저인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자본주의 에 숨겨진 위험한 역사, 자본세 600년」이라는 부제가 선명한, 비판적 시각으로 일관한다.

“경제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숨겨져 존재하지 않는 양 취급되었지만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부채로 남았다.”는 자본주의에서의 `저렴한 값'의 서러움이 가로 세로 정연하게 나열된 현충원의 수없이 많은 묘비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처연하다.

비극은 언제나 절대적 권력을 가진 소수의 인간에 의해 저질러졌고, 언제나 목숨을 바쳐 그 위기를 극복하는 존재는 보통 사람들의 몫이다. 현충원에 묻힌 수많은 호국 영령들은, 그리고 전쟁과 이념의 극한 대립의 와중에 학살당해야 했던 민간인들은 단 한사람도 원인을 만들지 않았고,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전쟁의 비극이 커지는 `과정'에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결과'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라의 미래와 백성, 그리고 영토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념마저 당당하게 지켜왔다. 그러고도 그들은 역사에 선명한 이름을 남기는 일이 없으며, 다만 기억되고 영웅시 되는 것은 언제나 비굴하게 살아남은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자본주의는 세계를 싸구려로 만듦으로써 작동해왔다'는 저자들의 메시지가 뚜렷하다. 기후 위기, 극단적 불평등, 금융 불안 같은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에서 비롯된 한국전쟁의 팽창과 지배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는 지구상에서 사실상 소멸되었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낡은 이념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몇몇 국가들마저도 성장과 팽창중심의 자본주의에 몰입하고 있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현 체제를 “자본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을 만나는 지점”이라고 단언한다. “국가와 제국은 (경제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자연을 적은 비용으로 동원하기 위해 폭력, 문화, 지식을 활용한다.”는 진단은 이념전쟁의 비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당장의 목숨을 위협하는 살상무기들과 서서히 삶을 옥죄는 자본의 탐욕과, 그로인해 위기를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게 하는 잔혹한 비열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건설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경찰이 위태로운 망루에서 공동선과 사람다운 삶을 절규하는 노동자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일이 다시 벌어지는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 전쟁터와 다름없다. 그리고 그런 비극에 침묵하고 외면하는 세태 또한 절망에 가까운 식민(植民)과 희생을 예고하는 징후가 뚜렷한데, 대부분의 우리는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저렴한 것들'을 지배하며 끊임없는 탐욕과 권력을 지배자본의 그늘아래 끝없이 넓은 현충원 사병 묘역의 묘비석이 처연하다. `저렴한 것'이 그저 `그 값이 보통의 수준보다 싸다'는 것이 아니라, `낮은 것(底)'을 `살피는(廉)' 시대. 역사는 늘 그렇게 지켜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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