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와 촛불의 이중주
초와 촛불의 이중주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3.05.24 17: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금년 들어 하루에 두 번씩 촛불을 켜고 끄며 삽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 늦은 밤 잠들기 전에 감사기도와 성경읽기를 하는 까닭입니다. 거실 전면에 모신 고상과 마리아상 앞에 아내와 나란히 앉아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합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아니 귀천이 가까워져서인지 할수록 절실해지고 깊어집니다.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다가 소진되어 사라지는 초를 보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남은 생이 그럴 것 같아 애잔하지만 남은 생이라도 초처럼 빛이 되는 삶을 살기를 희원합니다. 하여 오늘은 제 심연에 있는 초와 촛불의 이중주를 보냅니다.

초는 불빛을 내는 데 쓰는 물질의 하나이고 촛불은 초에 켠 불을 이르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영어는 candle이고 한문은 촉(燭)인데 서양초가 들어오면서 한문과 우리말이 뒤섞인 양(洋)초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되었습니다.

촛불 역시 영어는 candlelight이고 한문은 촉화(燭火)입니다. 결혼식 때 쓰는 화촉도 종교의례나 생일잔치와 각종 기념행사 때 쓰는 촛불점화도 여기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초의 기원은 불명하지만 뭄바이나 그리스의 유적, 중국의 분묘에서 청동으로 만든 촛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BC 3세기 이전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오랫동안 밀랍이나 수지로 만든 수제양초가 사용되다가 200년 전인 1800년대 초에 스테아린 양초와 파라핀 양초가 발명되어 밝고 아름다운 유백색의 초가 공정을 통해 대량생산되고 보급되는 전기를 맞습니다.

근자엔 향기 나는 형형색색의 초들이 제작되어 자태를 뽐내지만 그 중 일부는 촛불 아닌 장식품으로 기능하다 버림받으니 얄궂기 그지없습니다. 아무튼 초는 희생의 상징이자 예배자의 헌신의 상징이며, 촛불은 빛을 상징이자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가시떨기나무의 불꽃가운데서 나타나셨듯이(출 3-2) 성당(교회)들도 제단에 촛불을 켜놓고 미사(예배)를 드립니다. 진리를 밝힌다는 의미와 하느님이 임재 하셔서 받으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 촛불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기신 부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초는 몸의 가장 높은 곳부터 태워 환한 빛을 만들어냅니다. 불꽃은 갈대처럼 흔들리지만 모두 태우면 몸의 가장 낮은 곳, 영혼의 밑바닥에 도달합니다. 결국 공(空)을 남기고 사라지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촛불은 유한합니다. 촛불은 밑과 좌우를 도외시하는 언제나 수직 상방향입니다. 촛불은 이중적입니다. 희망을 갈구하지만 절망을, 구원을 가슴에 품지만 좌절을 자양분으로 타오릅니다. 촛불은 스스로 불붙지 않습니다. 누군가 불을 붙여야 빛을 냅니다.

촛불은 집단적이고 의존적입니다. 드넓은 광장에서 펼쳐지는 촛불집회와 촛불시위가 그렇습니다. 혼자는 외로워 끊임없이 또 다른 하나를 찾고 내가 아닌 너에게, 내가 아닌 우리에게 위안을 찾습니다. 하지만 의식에 동원되는 집단적 촛불은 개인의 자아를 갉아먹습니다.

촛불은 본래 유한했고 어둠을 먹고 자랐지만 어둠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은 촛불이 아니라 촛불에 온갖 사회적 정치적 의미 부여를 하며 진영의 이익도모에 혈안이 되어있는 정치모리배들입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된 촛불집회가 반대진영의 타도와 굴종을 강요하는 촛불시위로 변질되고 있어 개탄스럽습니다.

`좋은 스승이란 촛불과도 같다. 자기 스스로를 소비해서 남들을 위해 불을 밝힌다.'는 터키(튀르키예)공화국의 창시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말이 뇌리를 스칩니다.

심지 없는 초, 불 못 밝히는 초는 초가 아닙니다. 심지가 곧고 실해야 촛불이 밝고 아름답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시인·편집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