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밤
봄 밤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3.03.2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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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봄은 사계절 중 가장 시각적인 계절이다. 꽃이 가장 많은 철이기도 하고 파랗게 돋아난 새싹과 나뭇잎이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이러한 봄에 깜깜한 밤은 훼방꾼이나 마찬가지지만, 달빛이 있는 밤은 봄의 빛깔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 준다.

송(宋)의 시인 왕안석(王安石)은 달이 뜬 봄 밤의 정취에 빠진 채 밤을 지새고 있었다.

봄 밤(春夜·춘야)

金爐香盡漏聲殘(금로향진루성잔) 금빛 향로에 향은 다 탔고 물시계 소리는 희미한데
翦翦輕風陣陣寒(전전경풍진진한) 가벼운 바람 솔솔 불어 한기가 자꾸 느껴지네
春色惱人眠不得(춘색뇌인면부득) 봄빛이 사람을 고뇌하게 해서 잠 못 드는데
月移花影上欄幹(월이화영상난간) 달이 꽃 그림자를 옮겨다 난간 위에 놓았구나

꽃 피는 봄이 왔건만 시인의 방에는 여전히 화로가 피워져 있다.

밤에는 추위가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로가 금빛으로 화사하고 거기에 향을 피워 놓은 것으로 보아 시인은 집 떠난 남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는 아낙의 모습으로 빙의한 듯하다.

남편을 맞기 위해 초저녁에 피운 향은 이미 다 타 버렸다. 물시계를 가득 채운 물도 거의 다 떨어져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하다. 안타까운 하룻밤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귀는 방 바깥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남편의 발자국 소리 대신 들리는 것은 솔솔 부는 가벼운 바람 소리이다.

그 바람 탓인지 한기가 수시로 몸에 느껴지는데 그 한기는 바람 탓만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봄빛이 자신을 근심에 빠뜨려서 잠 못 들었노라고 둘러대지만 기실은 봄빛을 같이 즐길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서 잠 못 이룬 것이리라.

남편이야 오든 말든 봄 밤은 무정하게 흐를 뿐이다. 방문에 어른거리던 꽃 그림자가 사라진 것이다.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 꽃 그림자가 난간으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봄 밤의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그려 낸 시인의 솜씨가 탁월하다고 할 것이다.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는 봄의 세상은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 낸다. 지친 삶을 달래기에 봄날 꽃구경 만한 게 또 있을까?

그리운 사람을 재회하여 봄을 즐긴다면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혼자라도 봄은 충분히 즐겨 주어야 한다. 봄 밤 하루쯤은 봄 구경 나설 설렘으로 잠 못 드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가?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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