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가 있는 삶
무늬가 있는 삶
  •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 승인 2023.03.2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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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새벽녘,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가 아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가랑가랑” 낮은음자리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달빛에 얼굴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난다. 볼살이 붙은 둥그스름한 얼굴에 눈두덩이 조금 도드라졌다. 도톰한 코에 턱살도 좀 붙었고 지워진 눈썹은 흐릿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를 보고 많이 닮았다고 하던 사람들의 말을 그저 덕담이려니 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살이 붙어 둥글둥글해지고 모난 구석이 사라진 내 모습과 많이 닮은 듯하다.

아내의 얼굴을 이렇게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본 것이 언제인가 싶다. 젊었을 때의 앳되고 청순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어느덧 예순이 다된 장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40년 가까이 되었으니 한세월이 훌쩍 가버렸다.

은은한 달빛이 아내의 얼굴에 머무르고 있다.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니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집을 사고 승진을 하고, 아이들이 성장해서 취업하고 결혼을 했을 때가 내 삶의 기쁨이었다. 반면에 잦은 술과 사무실에 매여 있는 시간이 많아 가끔은 다투고 많은 추억 만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진정 나만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건대, 정작 내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은 그런 뭉뚱그려진 대부분의 일상이 아니고 순간순간의 느낌이나 인상적인 한 장면인듯싶다. 공무원교육원에서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던 단발머리 아가씨, 길거리를 지나는 내 모습을 보고 택시에서 내리며 반가워하던 표정, 내가 사준 음식이 맛있다며 입가에 묻혔던 자장면, 나와 다투었던 날 라디오방송에 나가 소방홍보를 하던 깜찍한 목소리, 내가 출장 갔던 날 밤에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 등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살아온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여행을 다녀와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몇 컷에 불과하다. 책을 읽어도 정작 기억에 남는 건 몇 줄에 불과하다. 동해안을 다녀와서도 전망대에서 본 아름다운 절경보다는 눈 쌓인 대관령을 넘어가다 문득 잠에서 깼을 때 창가에 곱게 쏟아지던 햇살이 더욱 아름다웠고, 서편제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비가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벱이여”라는 대사만 한동안 귓가에 웅웅거렸다.

가는 길이 정해져 있는 삶, 이미 규범화된 질서에는 새로움이나 역동성이 없다.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사건은 강렬하지도 오래 기억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만의 색다른 체험이나 느낌은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오래 기억된다.

세속적인 욕구를 채우고, 남의 시선과 생각에 얽매이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살아졌던 삶이다. 늘 울타리 안에서 만들어진 규칙을 벗어나지 못한 고루한 삶이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원죄를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인간은 그때부터 신에 버금가는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뜨거웠던 하루의 열정을 뒤로하고 석양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는 시간이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삶이 아니라, 나무의 결처럼 나만의 무늬가 있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고루한 관념을 벗어나 좀 더 세상을 자유롭게 바라볼 수는 없는 걸까. 강변이 보이는 찻집에 앉아 한없이 멍때리고,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오래된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영상을 찻집으로 불러보리라.

그럼에도 지나간 계절은 잊혀지고,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고, 이 계절 또한 언젠가는 잊혀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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