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政爭)
정쟁(政爭)
  • 김경수 시조시인
  • 승인 2023.03.0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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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수 시조시인
김경수 시조시인

 

폭풍우가 지나가고 잠시 잠잠해진 어느 날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회상에 젖은 선비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처음에 그들은 모두가 한몸였다.

그들의 정체는 고려 말 권문세족을 몰아내기 위해 등장한 신흥사대부였다. 그들이 등장한 이유는 수탈당한 백성의 울분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울분만 갖고 해결이 어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대적할 만한 조직화된 정치세력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신흥사대부들은 하나가 되어 싸웠고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몰아내었다. 이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하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일이 끝난 후 둘로 나뉘었다. 역성혁명파는 고려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자고 주장하였고 온건개혁파는 고려 자체는 존속시키고 개혁만을 수행하자는 주장이었다. 그 결과 역성혁명파는 온건개혁파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이때 대표적인 인물로 정몽주가 사라졌다. 하지만 또 다시 역성혁명파는 그들 간에 1·2차 왕자의 난이라는 정변이 있었고 그 속에서는 정도전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약 50년 뒤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는 계유정난이 있었고 그 후 50여년 뒤에는 진성대군이 반정에 의해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으로 즉위했다.

이런 과정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정변을 통해 다수의 공신들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공신집단과 왕실의 외척인 척신세력 등이 합쳐서 훈구파를 형성하였다. 그런 그들이 신흥사대부이자 역성 혁명파의 한 갈래였음에도 이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 말 권문세족과 비슷하게 닮아가고 있었다.

역성혁명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부패해 가는 동안 온건개혁파였던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연마하면서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힘을 길렀다. 거기에 필마로 돌아온 선비 길재가 그들의 앞에 있었다. 이들이 바로 정계에 등장하면서 집권 훈구파에게 끈질기게 저항했던 사림파라는 정치세력이었다. 이렇게 등장한 사림파는 훈구파의 심한 견제를 받게 되고 그것은 사림의 탄압으로 이어져 사대사화를 일으키고 만다.

하지만 사림파는 한 번 사화를 당할 때마다 극심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다시 재기에 성공하여 선조 때에 이르러 드디어 훈구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림파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정치이념과 학통으로 연결된 조직을 지닌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마저도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자 그들 또한 갈라지기 시작했다. 같음 속에 다름을 내세운 결과 사림 내부가 분열된 것이었다. 결국 사림도 이런 과정을 거쳐 집권 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조선의 정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고로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의 도움이 있었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정쟁의 본질은 성격이 다른 두 정치세력 사이의 권력투쟁이다.

하나는 집권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도전세력이다. 또한 분열과 대립이 거듭되는 반복 속에서 동질성과 이질성으로 부딪치는 세력들일 것이다.

이러한 정쟁의 존재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정쟁은 필요한 것일까 정쟁을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만약 정쟁이 없다면 견제 없는 정치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백성의 삶 또한 의문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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