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하얼빈
  • 오승교 중원교육문화원 사서
  • 승인 2023.03.06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 읽기
오승교 중원교육문화원 사서
오승교 중원교육문화원 사서

 

`안중근은 다시 조준했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찰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일본인 세 명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러시아 현병들이 안중근을 몸으로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코레아 후라” 대한 독립 만세다.

소설 `하얼빈'(김훈 저)은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안중근의 일생을 말하기보단 이토를 죽이기로 한 이유, 과정, 거사 후의 재판 과정 등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토를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바로 잡혔다. 그리고 신문 과정에서 안중근은 말한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재판과정에서의 정당성과 당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체포 후의 계획까지 철저히 계산해두고 있었다.

미조붙이 검사의 신문과정은 안중근에게 이미 예상된 과정이었다. 질문을 할수록 안중근은 점점 확신에 찼고 준비된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 땅이었지만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지못하고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재판과정에서 공개 재판을 받지 못했고 국제법에 따른 포로 신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910년 2월 7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6회 공판 만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공판부터 사형 집행까지 진행되었다.

`하얼빈은 내가 이토를 죽인 자리이므로 거기는 우선 내가 묻힌 자리다. 한국이 독립된 후에 내 뼈를 한국으로 옮겨라. 그전까지 나는 하얼빈에 묻혀 있겠다.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내 뜻에 따라다오.'

사형 집행 후 한국사회가 크게 동요할 것으로 보인 일본이 집행 후 시신을 바로 감옥 근처에 묻어 버렸다. 안중근의 집안에서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고 후에 여러 경로로 시신을 찾았지만 안중근은 끝내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에게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지사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안중근의 거사는 단순히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교육가로서 학교를 건립하고 인재를 양성했고 동양평화론 등을 집필한 사상가였다.

마지막으로 이토를 처단 후 재판에서 보여준 그의 신문 기록은 열강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처음부터 준비된 외교가였다.

지난 수요일은 104년 전 3·1절 만세 운동이 울려 퍼진 날이었다. 만세 운동과 안중근의 평화 정신은 우리 애국 운동의 큰 울림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비록 안중근의 시신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민족의 가슴 속 깊이 남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 비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