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던 이
앓던 이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3.03.0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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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어금니를 뽑았다. 중간에 충치가 생겨서 신경 치료하고 금으로 씌웠었다. 지금까지는 달래가며 내 치아로 그럭저럭 잘 써왔다. 하지만 쓸 만큼 썼던가 보다.

치아 뿌리 쪽 잇몸이 붓고 아프기 시작했다. 가끔 붓고 가라앉고 하던 것이 요즘 더 잦아졌다. 치과에서는 잇몸까지 망가지기 전에 임플란트를 심잔다.

앓는 이 끌어안고 고생하느니 뺄 거면 빨리 빼자 싶었다. 수업 없는 날을 골라 이를 뺐다. 마취했어도 헤집어 놓은 잇몸을 꿰맬 땐 좀 아팠다. 일주일 뒤 실밥 풀고 나서 이삼 개월 기다렸다가 새 이를 심을 거란다.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하다'라는 표현은 정확한데, 댕그라니 뽑혀 나온 어금니를 내려다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오랫동안 부려먹다가 병드니까 맨몸으로 내쫓은 몸종 같아 짠했다.

어디선가 `이력서(履歷書)'의 `이(履)'자가 `신 리, 밟을 리'여서, 신발을 보면 그 사람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어금니가 내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의 밥상은 물론, 친구들과 수다 떨며 먹던 떡볶이, 세상 고민 다 짊어진 듯 설익은 철학을 논하며 홀짝거리던 대학가 주점의 생맥주 맛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첫 아이 임신해서 지독한 입덧에 시달릴 때 유일하게 먹었던 시퍼런 자두 맛도, 또 어미 새처럼 씹어서 애들 입으로 넣어주던 이유식도 말이다. 딱딱한 견과류, 질긴 오징어, 찬 아이스크림, 뜨거운 호떡, 뭐든 군소리 없이 다 씹어 으깨주었다.

그러다 단단하던 몸이 서서히 망가졌겠지. 금이 가고 그 틈새로 충치균이 파고들어 썩고, 어금니는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앓던 이'가 되었으리라.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제대로 못 씹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가만히 있을 때조차 욱신거리는 데야 고마운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다 치료해 씌우고 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산해진미를 찾았었다.

어릴 적 면 소재지에 병원이 하나 있었다. 유일한 병원이어서 상처가 나도, 머리가 아프다거나 귀나 이가 아파도 그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갈 때면 옷을 추켜올리고 차가운 청진기를 가슴에 댔다가 눈을 까뒤집어 보기도 하고, `아' 하라며 입을 벌리게 해서 납작한 쇠막대기로 목젖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주사를 맞았다. 그게 너무 무서워서 병원에 가길 정말 싫어했다.

어금니가 썩었을 때도 버티다가, 버티다가 죽게 아파서야 병원에 갔다. 무시무시한 펜치를 보고 눈물 콧물 난리가 났었는데 정작 뺄 때는 하나도 안 아팠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 뺀 게 바로 그 어금니 자리였다.

다른 이는 거의 집에서 뺐는데 빠진 이는 지붕에 던져졌다. 유치였기 때문인지 그렇게 하면 까치가 헌 이를 물어가고 새 이를 가져다준다는 말이 있었다.

또 어른들이 놀리면서 불렀던 `앞니 빠진 갈가지'란 노래도 있었다. 그 노래가 수치심이 아닌 정겨운 추억으로 기억되는 건 놀림보다는 서툰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나도 삼 남매를 키우며 그 노래를 불렀더랬다. `갈가지'가 새끼 호랑이(사투리)라는 것도 알려주면서.

속앓이하다 놓아야 했던 몇몇 인연이 떠오른다. 그 끈은 사라졌어도 함께 한 역사는 잊히는 게 아닌가 보다.

무심할 수 없는 내 마음과 달리 어금니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부디 고요하고 평화롭게 영면에 드시길 마음으로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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