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찍는 2월, 돌담길을 걸었다
쉼표 찍는 2월, 돌담길을 걸었다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3.02.23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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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초봄의 햇살이 따스하다. 본격적인 농사철도 아니고 마당에 풀도 아직 잠들어있고 바람은 순해지고 나는 집밖이 궁금하다. 어중이 시골 사람에게는 연 중 2월, 지금이 가장 여유롭다. 어제는 연고도 없고 오라는 이도 없는데 이웃마을로 마실을 갔다. 동네고삿을 걷다가 눈에 들오는 것은 새로 지어 근사한 저택이아니라 낮은 돌담이다. 돌담은 그 동네를, 둥지를 오랫동안 지켜 오신 굳건한 어르신의 이마에 주름진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본능이다. 자연석으로 낮게 쌓은 돌담 집에 눈길이 간다. 남편은 내게 돌만 보면 눈동자가 달라진다고 한다.

돌담길을 걷다보면 담장 넘어 안주인이 궁금해진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마당에는 어떤 꽃과 나무들을 가꾸고 있는지 자꾸만 집안을 힐끔거린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낮선 이가 반갑지 않은 누렁이가 동네가 울리도록 컹컹 짖는다. 돌담 사이 골목길은 오래된 친구 같이 편안하다. 돌담은 크고 작은 돌들을 서로 어우러지도록 쌓았다. 잘 쌓은 돌담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이 있고 형제가 있고 또 이웃이 있어야 우리가 되는 것 같이.

산 밑에 자리 잡은 행세깨나 했을 것 같은 저택의 담장은 일정한 크기의 육면체 사괴석으로 높게 담을 쌓았다. 웅장한 멋은 있으나 나 같은 촌사람의 눈엔 너무나 거대하고 육중하여 중압감을 느낀다. 아무도 넘보지 말라는 무언의 눈 부라림 같다. 권력과 부의 상징 같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러나 자연석으로 쌓은 낮은 돌담은 순하고 착해 보여 말을 걸어 보고 싶어진다. 나 혼자는, 돌 하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함께 라야, 우리라야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 크고 작은 돌이 그 나름의 역할과 자리를 채워줘야 담으로의 명제가 되는 거다.

돌담은 안과 바깥의 경계를 나눈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는 마당을 가꾸는 마음씨 좋은 주인을 보는 것 같다. 여름엔 담을 타고 넝쿨식물이 안팎을 넘나들 것이다. 그 담의 품안에서 안주인은 텃밭과 꽃을 가꾸며 알뜰하게 살아 갈 것 같다. 단단한 돌이지만 제대로 쌓아 올리지 못해 허물어지면 삶도 울도 되지못하고 흉물이 된다. 가족을 다독거리며 따뜻하게 살아갈 것은 돌담 집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야트막한 담장이 필요하지 싶다. 담장 없이 수시로 넘나들다보면 서로를 상하게도 하고 매일 뻔한 놀이에 싫증이 날 수도 있다. 낮은 담장 밑에 나만의 작은 꽃을 피우며 살아가는 것이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요즈음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게 담이 아닌 벽을 쌓고 살고 있다. 슬픈 일이다. 구멍이 숭숭나있는 돌담사이로 바람이 드나들 듯 사람의 정도 드나들던 세상은 먼 옛날 동화책속의 이야기 같다. 사람의 관계가 참 어렵다.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 되는 것이 관계의 진리인가보다.

서로 다른 사람이모여 가족이 되고 세상을 만들 듯 크고 작은 돌을 이용해 담장 짓고 그 안에 사람이 살아간다. 지구 한쪽에서는 전쟁으로 피를 흘리고 한쪽에는 지진으로 생사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이즈음 오늘 내게 주어진 이 일상의 평온함이 감사하다. 초봄의 햇살에게 절하고 싶다. 이웃동네의 돌담길은 내 유년, 어느 햇살 고운날찍은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년 중 유일하게 찍을 수 있는 쉼표 같은 2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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