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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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윤미 수필가
  • 승인 2023.02.2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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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윤미 수필가
박윤미 수필가

 

지난 2월 K와의 제주 여행에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동문시장에 들러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며칠을 오르고 걷고 하느라 몸은 으스스하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피곤이라는 놈이 시비를 걸어올 것만 같았는데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나타나자 이심전심으로 멈춰 섰다. 양팔 벌리면 감쌀 정도의 공간에 꽤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여주인은 여윈 몸을 가판대에 갸우뚱하게 기대어 서서 두 손만 부지런히 놀리고 있는데 호떡을 먹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사람 모두 그 숙련된 손놀림에 눈을 떼지 못한다. 지금은 삶의 고단함으로 시든 모습이지만 한때는 누구보다 빛났을 이목구비와 선 고운 자태다.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알아서 계산하라고 무표정하게 턱을 까딱한다. 손님들은 `오천원을 냈으니 삼천원 가져가면 되죠?'하며 자신의 양심을 모두에게 알리고 거스름돈을 더 가져가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돈을 센다. 험한 인생 역정에도 후반부에는 나름 안정적인 호떡 왕국을 이룬 그녀의 삶을 상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호떡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뜨끈한 어묵 국물까지 들어가니 온몸에 온기가 퍼지고 이게 여행의 맛이지 싶었다. 하나씩 더 먹고 싶지만 여행의 대미는 좀 더 제주의 맛이 담긴 메뉴로 장식하고 싶어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호객꾼에게 이끌려 식당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잡아놓은 물고기 신세인 걸 직감했다. K는 성게미역국을 나는 해물 지리를 주문했는데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고도 아쉬움이 남았다. 부실하고 싱싱하지 않았다. 우리는 호떡 왕국을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여왕의 분위기는 아까와는 사뭇 달랐는데 장사가 끝날 참이라 힘이 난 것 같았다. 오늘같이 추울 때는 역시 장사가 잘되는데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면 매상이 점차 줄어서 한여름에는 하루 15만원 정도 판다고 한다. 수입이 짭짤하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허리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큰돈이 들 예정이라고 한다. 자세가 마네킹 같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여러 번 수술했던 이야기, 지금도 곳곳이 아프다는 이야기, 목소리도 커지고 아까 상상만 했던 그녀의 사연들이 저절로 술술 나온다. 1년 내내, 매일, 긴 시간 동안 이렇게 간신히 서 있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일지 그녀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삶의 투사였다.

그런데 그때 키가 엄청 작은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너무도 자연스럽게 휴지도 치우고 어묵을 끼웠던 나무 막대도 정리한다.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늦은 시간에 와서 여주인을 도와야 하는 관계인가보다. 그런데 둘의 대화를 들어보면 갑과 을의 관계다. 갑은 비닐봉지에 호떡을 몇 개씩 담으라고 명령하고 을의 손길 하나하나를 채근한다. 을은 동요도 없고 대꾸도 없이 일을 계속한다. 을의 솜씨가 서툰건 사실이었다. 갑이 을에게 한심하다고 말했는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는지 계속되는 포격에 우리는 아주 민망해졌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나는 을의 눈과 마주쳤다. 참으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하고 맑은 달덩이 같았기 때문이다. 날 보고 웃는 게 아니라 그냥 자체로 고요히 웃는 얼굴이었다. 주름 하나 패여 있지 않았다. 긴 삶에서 그 어떤 세모들의 뾰족함도 이 매끈한 동그라미에 상처 하나 주지 못했다. 그녀는 결코 만만한 을이 아니었다. 얼굴에, 몸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부드러운 움직임에, 고요함에 나는 감히 보살을 떠올렸다. 누가 승자인가?

나는 가끔 제주 동문시장에서 만난 보살님, 한때 꿈이었던 호호 할머니를 떠올리며 잔뜩 당겼던 온몸의 근육들을 모두 놓아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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