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게 살기
괜찮게 살기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2.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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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10년간의 아이돌보미 활동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괜찮아!'이다.

엄마 품을 떠나 낯선 손에 맡겨지면서 아이들이 가지는 심리적 부담은 어른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최대한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고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했다.

아이가 물 컵을 깨트렸을 때도

“괜찮아! 선생님 손은 마술손이라 금방 치울 수 있어.”

아이가 넘어졌을 때도

“괜찮아! 약 바르고 뽀로로 밴드 붙이면 금방 나을 거야. 뽀로로가 뾰롱뾰롱 안 아프게 해 줄 거야.”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이들이 떼를 쓸 때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향해서도 `괜찮아! 곧 괜찮아 질 거야'를 한 번씩 날려 주었다.

어릴 적 어느 분이 재물 복 빼고는 다 있는 사주라고 하더니 나는 정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것 빼고는 큰 어려움 없는 날들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한테만큼은 별일이 안 생길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았다. 나한테도 별일은 생길 수 있는 거였다.

그 때 내가 제일 먼저 꺼내든 주문도 `괜찮아'였다.

`의술 좋은 의사들이 잘 고쳐줄 거야. 설사 잘못 된다 하더라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세상과 작별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야.'

겁이 날 때마다 가슴을 다독이며 `괜찮아. 괜찮아.'를 되뇌었다.

다행히 현대의학은 눈부시게 뛰어나서 나는 완치판정을 받았고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나와 내 가족은 위험한 일을 겪지 않으리라는 `생존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환상 때문에 죽는 날까지도 손에 움켜 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리라. 내게도 위험은 닥칠 수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생과 작별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인식만 있어도 나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 생존환상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생존환상이라도 없었다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세상이 아무리 위험천만해도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환상이 희망을 꿈꾸게 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본능적으로 거짓환상이라는 것을 찾아내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걸 보면 인간은 정말 영민한 동물임에 틀림없다.

지진으로 고생하는 튀르키예에 보낼 겨울 잠바를 후원해달라는 계시물을 보고 관리실에 갔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옷가지를 들고 모여들었다.

TV 화면으로만 보았던 먼 나라의 비극이 쌓여진 옷가지를 보니 현실로 다가왔다.

손 써볼 새도 없이 벼락처럼 떨어진 그들의 불행이 발끝까지 찌르르 전해졌다.

이 옷가지들이 몸은 덥힐 수 있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찌하겠는가? 낯선 땅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의 불행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이처럼 결코 괜찮을 수만은 없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내일 어찌될지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그렇다고 한 번 뿐인 삶을 불안에 떨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존환상을 믿고 으시딱딱 살아보는 거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뻔뻔스레 자비를 구하기도 하면서 최대한 괜찮게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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