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 그리고 서원과 제천향교
공교육 그리고 서원과 제천향교
  • 김명철 제천교육장명
  • 승인 2023.02.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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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제천교육장명
김명철 제천교육장명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흔히 말을 하는 데 과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AI 시대에 우리 학생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과 함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교육의 본질과 공교육의 사명을 생각해 본다.

신분제가 존재하던 전통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는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삼국시대는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 및 신라의 국학 등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수도에 국자감이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교육기관은 서울의 4부 학당과 성균관, 지방의 향교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세운 관학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의 사학도 인정이 되었으며, 조선시대 서원이 등장하면서 향교와 더불어 지방 교육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향교와 서원은 뭐가 다를까?

우선 고을에서 학교를 세운 위치가 달랐다. 국립 학교였던 향교는 대부분 관아가 있는 고을 중심지에 세웠다. 반면 서원은 읍성의 바깥쪽, 그것도 주로 산에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으로 건물 배치에서 차이가 있었다. 향교와 서원에는 교육을 하는 강당과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는데, 교실이라 할 수 있는 강당 건물은 향교와 서원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제사 공간을 비교해보면 향교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지만, 서원에는 동무와 서무가 없고, 사당 한 채만 있다. 향교에서는 공자를 비롯해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를 모시므로 여러 채의 사당 건물이 필요했지만 우리나라 유학자만 모시는 서원은 사당 한 채만 있어도 충분했다. 또한 향교는 대개 평지에 세웠고, 국립 교육 기관이었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 방식이 대개 엇비슷하다. 이에 비해 서원은 건물 배치에 있어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서원이 생기기 시작한 초반만 해도 서원과 향교는 경쟁 관계였다. 하지만 점차 서원이 향교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되면서 양반 자제들이 주로 서원에 입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에는 평민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게 관례처럼 되었다. 처음엔 향교의 성함과 쇠함의 정도를 수령의 인사에까지 반영할 정도로 국가에서는 향교를 중시하였다. 하지만 서원의 기세에 눌려 향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조선 중기 이후 훈도(향교의 교사)제를 없앴다. 그 뒤 향교는 점차 교육 기능을 잃어갔고, 고종 31년(1894)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교육 기능은 사라졌다.

고려 공양왕 1년(1389)에 지어진 제천향교는 원래 마산 서쪽에 있던 것을 선조 23년(159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그 뒤 순종 융희 1년(1907)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불에 타 없어졌고 1922년에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있고 그 밖에 부속건물이 있다.

학생들은 새로운 학년을 준비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향교를 찾아가서 조상의 교육적인 열정과 온고지신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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