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사에서 생명을 생각하다
반야사에서 생명을 생각하다
  • 노동영 변호사·법학박사
  • 승인 2023.02.0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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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노동영 변호사·법학박사
노동영 변호사·법학박사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방생기도가 있다 하여 영동군 황간면의 반야사를 찾았습니다. 성지순례와 같이 멀리 수도권의 큰 사찰에서 찾아오시는 신도들과 함께 방생법회를 여는 자리였습니다. 필자에게 20대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가장 가난했으면서도 당시의 추억을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풍요로웠던 시절이기도 했는데, 그 시절에 수행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반야사에서의 1년의 경험은 매우 소중했습니다.

방생(放生)이란 살생과 폭력을 피하고 생명의 공덕을 쌓기 위한 불교의례입니다. 전국의 사찰마다 붕어, 잉어, 자라 등 기존 방생물이 많아져서 수(水)환경에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종을 잘 살펴 방생한다면 불교에서는 이로 인해 생전에 큰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의례를 치르고 나면 실생활에서의 마음가짐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2006년 고속철도 건설 구간 중 울산과 부산 사이의 천성산 원효터널 공사를 두고 내려진 대법원판결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공사구간의 생태적 보호 필요성이 인정되었는데, 동물이 아닌 식물자원으로는 법의 주체성이 불가하여 도룡농으로 대표되는 동물의 권리주체성이 문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 환경침해를 이유로 법에서 권리능력 또는 소송에서 당사자능력이 인정될 수 있는지의 문제였습니다(정확히는 소송에서 당사자능력의 문제입니다. 태아나 미성년자처럼 권리능력은 있지만 권리의 침해가 있을 때 권리의 회복을 위한 당사자능력은 제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도룡농에게 권리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재판에서 진지한 심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지구 또는 환경이 사람의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에 경각심을 일으키고, 사람 중심의 현실에 도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더라도 장차 발전된 생각과 행동으로 언젠가 돌을 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2004년에서 2005년까지 반야사에서 머무를 때 밤하늘에는 쏟아지는 별들로 가득했고, 수달과 오소리의 터전이었으며, 백화산 자락의 물길은 참으로 맑았습니다. 새벽에 나타나는 수달이 먹고 놀던 반야사 석천계곡은 금강으로 흘러들어 장구한 물길을 보탭니다. 지금도 전쟁이 피해갈 첩첩산중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티가 자꾸 묻어나 언제까지 청정환경이 지켜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청산이'라고 불렀던 삽살개는 반야사에서 마음껏 뛰어놀았습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은 늘`흰둥이'와 같은 진돗개나 백구와 함께였습니다. 시골집 마당에서 키웠으니 산으로, 들로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지금처럼 반려견들이 실내에 함께하는 일상과는 그 환경이 아주 달랐습니다. 애완견으로 불리던 실내의 반려견들은 행복할까요? 애완에서 반려로만 이름이 바뀌었지 반려견들의 환경을 생각할 때 사람이 장난감처럼 예뻐한다는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전히 사람 중심의 시각과 환경 때문입니다. 반려견들은 실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묶여있더라도 마당에서 보다 자유로운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제라도 지극히 사람 중심의 생각을 내려놓고 어려울지라도 사람 아닌 다른 동물과 식물들 입장에서 이타적인 마음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장차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호소하고 그리워하게 될`생명존중'과 `휴머니즘'의 실천 내지는 복원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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