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버킷리스트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3.01.30 2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여름방학을 앞두고서다. 아들이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엄마와의 자유여행을 제안해왔다.

일단 생각해보자고는 했지만 이미 내 맘은 들뜨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지? 만나는 지인들도 백이면 백 무조건 가라고 하고, 일전에 `아들아 지금 가자!'했다는 수필가 얘기도 들은 터다.

남편도 허락한 마당에 주저할 이유가 무엇이랴.

버킷리스트를 펼쳤다. 버킷리스트라야 거창하거나 순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 목록은 아니고, 그냥 노트에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두서없이 끄적여둔 것에 불과하다.

드라마를 보다가 `누구처럼 어떻게 해보기', 책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읽게 되면 `어디 어디에서 무엇무엇 하기' 등등. 어떤 건 달랑 단어 하나 적어 놓은 것도 있다. 거기서 보물을 캐듯 반짝이는 섬 하나를 건져 올렸다.

캐나다 동쪽 끝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다. 내세울 게 없는 외모가 닮아서일까 난 빨강머리앤을 무척 좋아했다. 노트엔 `빨강머리앤 섬-기쁨의 하얀 길, 반짝이는 호수, 연인의 오솔길, 유령의 숲 직접 보고 싶다'라고 적혀 있다.

뉴욕을 통해 빨강머리앤 섬에 갔다 오기로 했다. 그 후 `아침에 월든 호숫가 산책하기'와 `도깨비 언덕에서 도깨비 호텔 내려다 보기(퀘백)' 그리고 `조화로운 삶의 헬렌 니어링 농장(굿 라이프 센터)', 또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이 그 동선 안에서 들를 수 있는 여행지로 추가되었다. 짜놓고 보니 자유여행이 아니라면 이런 일정의 관광여행상품은 없을 듯싶다. 그래, 무조건 가자!

주말에 집에 온 아들과 조율해 여행 날짜를 잡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왕복 비행기 표부터 확보했다.

본격적으로 여름방학이 시작돼 항공료가 훌쩍 뛰기 전에 미리 사 두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쨌든 비행기 표를 끊고 나자, 렌터카를 예약하고 코스를 짜고 그에 따른 숙소를 예약하는 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알아보고 예약하는 일은 주로 아들이 하고 난 결제를 담당했다.

제법 큰 비용이 들었지만, 이렇게 여행 갈 때 쓰려고 비축해둔 돈이었으니 그저 운전기사를 자청해준 아들이 고마울 뿐이다.

거리로는 삼천 킬로미터 이상, 운전한 시간만 꼬박 35시간이 넘지 싶다. 내가 한두 시간 교대해 주긴 했어도 여행하는 내내 운전은 순전히 아들 몫이었다. 힘들까 봐 안타까워하면 “아들이 체력 좋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강행군을 버텨준 준 아들 덕에 열흘간의 여행을 무사히,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엄마, 화 안 내신다고 약속하면 말씀드리고요.” 출발하기 전 인천공항에서 아들이 한 말이다. 가는 날 오는 날 뉴욕에 숙소를 따로 예약했는데 알고 보니 둘 다 가는 날짜에 예약되었다는 것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하루 숙소비를 날렸다. 중간 중간 소소한 의견대립이 있었고, 마지막 날은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 자유의 여신상 크루즈도 못 탔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 맘먹고 떠난 여행이었다. 아들 역시 모든 걸 내게 맞추자 했을 테고. 이만하면 대만족이다. 함께하면서 나는 아들과 내가 확실히 다른 성향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왜 그토록 아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여행으로 얻은 최대 성과는 뭐니 뭐니해도 아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다음번엔? 노트에 적어본다. `남편과 둘만의 자유여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