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 선생님 망각의 강을 건너다
윤정희 선생님 망각의 강을 건너다
  • 심억수 시인
  • 승인 2023.01.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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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억수 시인
심억수 시인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배우 윤정희선생님이 영면에 드셨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2009년 뜻하지 않게 이창동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계기가 생겼다. 시 낭송 장면이 필요한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꿈같은 일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이창동 감독께서 전화를 주셨으니 영광이었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 `시'를 제작하기 위해 SNS를 검색하니 우리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단체의 시 낭송 모습을 영화 속에 담고 싶었단다. 그래서 사전에 조감독을 보내 헌팅을 했단다.

당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회장을 맡고 있던 나는 회원들과 상의하여 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비록 영화 속의 작은 분량과 단역이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윤정희 선생님과 함께하는 행운을 얻었다.

영화 속 미자를 연기하는 윤정희선생님의 열정 또한 대단했다. 촬영 당시 알츠하이머 초기증상이 있던 선생님은 치매를 앓는 할머니 같지 않은 소녀 같은 감수성을 지녔다. 칠순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참 곱게 늙어간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로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것은 착각이었다. 고생한다며 단역인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미소를 전한다. 함께하는 이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에 삶의 경륜이 묻어 있고 포용력이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 미자가 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진료를 받는 장면은 현실과 상황극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가슴이 먹먹했다.

미자는 중학생인 외손자와 둘이 서민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중풍에 걸린 회장의 요양보호사로 생계를 꾸려간다.

미자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원을 찾아가 시 강좌를 듣는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보아야 한다는 강의를 듣고 미자는 시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나뭇잎 사이의 햇살과 꽃의 아름다움에서 시상을 떠올려 본다. 시를 쓰는 과정은 자신을 정화하는 행위다. 윤정희선생님은 영화 속 미자를 통해 병마와 싸우며 죽음을 극복하려는 노인의 아픔을 실제와 같이 표현했다.

영화 속 미자는 외손자가 친구들과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하여 그 여학생이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외손자에 미자는 실망한다. 외손자를 대하는 복잡한 심경을 연기한 윤정희선생님의 절제된 사랑은 전형적 우리 외할머니 모습이다.

사건을 합의금으로 무마하려는 가해자 부모의 개념 없는 모습과 달리 미자는 피해 여학생의 추모 미사에 참석하고 그녀의 행적을 더듬어 따라가 본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미자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책임지는 인간 본성의 마음을 들려주는 윤정희선생님의 연기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영화 `시'는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는 작품이 되었다. 내가 출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알츠하이머의 공포를 시로 위로받고 시로 극복해 가려는 영화 속 미자를 통해 윤정희선생님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고통과 화해하는 삶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영화 `시'에 본명인 `미자'로 출연해 마지막 불꽃을 태운 배우 윤정희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망각의 강을 건너 가신 윤정희선생님 편안히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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