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감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3.01.0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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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좀 전까지만 해도 중천에 있었는데, 어느새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맞은편 아파트에 걸칠 새도 없이 바로 통과다. 여느 때와는 다른 급행 해넘이다. 속도를 줄일 기세는 없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땅으로 파고들었다. 검은 종이를 직각으로 잘라 세워 놓은 나지막한 아파트 뒤로 숨었다. 시선은 삭막한 검은 아파트에 고정되었다. 어릴 적 참나무백이가 있던 곳이다. 급행 해넘이라도 참나무사이로 하루의 일과를 미련스럽게 전해주었는데, 칼같이 잘라 작별을 고한다.

참나무 사이를 비집고 햇살이 비칠 때면 멀찌감치 보이는 고샅에로 줄달음이다. 조금 있으면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를 터, 서둘러 논을 가로 지른다. `이런 망했다.' 겨울 짧은 햇살에 살짝 녹은 논두렁에 미끄러져 사타구니에 논두렁이 끼였다. 신발이 논뻘에 박혔다.

한 놈의 참사에 모두 일시정지다. 가던 길을 멈추고 되감기다.

다시 참나무백이로 돌아와 삭정이며 고주배기를 모아 불을 피웠다. 신발은 나뭇가지에 걸쳐 땅에 박아두고, 양말은 두 손에 들고 앞으로 나란이다.

불이 잉거불에 다다르자 김은 모락모락, 볼은 촌놈 병에 걸린 듯 볼그레하다. 불의 최면에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 양말은 빵구가 나기 일쑤였다. 아무 말 없이 화톳불을 둘러싼 촌놈들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부엌아궁이 앞에서 고무래로 불을 끄집어내어 명주실과 바늘을 가져다 기었다. 긴 부분은 유독 두툼했다. 불편해도 잠시, 빨래하고 나면 우렁각시가 새롭게 기어놓았다. 여태 보지 못하던 검은 실루엣이 검은 감나무 줄기를 따라 올라가고 있다. 살이 제법 오른 새 한 마리 한 걸음 한 걸음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더니 나무초리에 이르러 멈췄다. 뒤따라 온 새 한 마리, 직박구리였다. 늦가을에서 겨울이 시작될 때까지 매일 같이 게걸스럽게 먹어대더니 배가 불렀다. 같은 새 다른 새다. 아침 햇살이 서쪽 아파트 유리에 반사되어 검은 종이를 삐뚤빼뚤 자연스럽게 잘라 눈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거기에 머리를 까딱까딱 거리며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새 그림자 장치를 하나 더했다. 움직이는 그림자놀이 영상을 보는 듯.

검은 새 그림자가 멈추었을 때 부동자세가 되었다. 건전지가 닳았나?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건가? 갑자기 일시정지다. 높게 날던 새의 날갯짓도 멈췄다. 기류를 탄 건가? 잠시 고독을 다지는 건가? 분주히 움직이던 동작은 일제히 멈췄다. 소리도 멈췄다. 움직이는 건 점점이 머릿속 생각과 눈으로 들어오는 화면 속 높이 나는 새의 실루엣의 이동뿐.

세초에 다지며 달았던 많은 것을 모조리 벗어버리고 온전히 벌거벗은 감나무를 찾아주는 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던 직박구리며 다정다감한 참새다. 감나무를 놀이터로 삼아 생채기를 내던 길고양이다. 별안간 휘청거리게 하지만 된바람도 반가운 벗이다. 아무것도 없는 내줄 것 하나 없는 메마른 나뭇가지를 찾아주는 반가운 친구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왔어?” 정도. 날카로운 발톱에 난 생채기나 매서운 바람에 부러진 나무의 깊은 상처는 해를 거듭하며, 아물고 멋진 목리로 받아들이는 감나무다.

아픔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면역력의 정도에 따라 아픔의 증상과 깊이는 비례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찾아오고 흔들어 댈 때는 정신을 잃는다. 그릇이 아닌데 담으려 했던 잘 못된 과오를 반성하며 자책을 한다. 스스로 진단하고 처방하며, 정신을 차려 이겨낸다 한들 상처의 흔적은 어찌 할 수 없는 거. 그 상처마저 자라면서 메꾸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게끔 하는 나무를 닮아가고자 해도, 덜 된 인간인 것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고독해지는 연습을 해야 할 듯하다. 온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멈춰선 순간들의 고독을 다져가며 끊임없는 성장을 하는 감나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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