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대하는, 가을과 겨울 사이의 시간
봄을 기대하는, 가을과 겨울 사이의 시간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2.12.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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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잎을 다 떨군 나무가 앙상해 보이는 계절이다. 그런 풍광에서 구순을 바라보고 계신 시어머님은 서글픔이 보이시는지 “너도, 다 늙어 진이 빠진 내 신세 같구나!”라는 말을 부쩍 자주 하신다. 우리의 삶을 사계에 비유하시며 늘그막에 이른 당신의 시간이 해마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음을 이르는 말씀이다.

감상에 젖은 어머님께 과학을 지식을 빌려 “추운 겨울에 얼어 죽지 않고 잘 버텨서 내년 봄 새싹을 틔우기 위해 준비하느라 그런 거래요.”라고, “그러니 어머님도 올겨울 잘 보내시고 저것들이 어떤 새싹을 내미는지 확인해 보셔요.”하며 잘난 체를 좀 했다. 의외로 어머님은 반색을 띠시며 “그려?” 하신다. 시각을 달리하면 다가오는 감성에도 변화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는 장면이다.

난, 겨울 산이 좋다. 산을 이루는 나무가, 나무를 품은 산이 본연의 형상을 드러내는 시간이기에 그렇다. 구부정하거나 곧게 뻗은 수형, 울끈 불끈한 힘이 깃든 나무의 가지, 상처를 품은 옹이 등을 볼 수 있어 좋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느끼는 막연한 좋음이었는데 <나무의 시간/이혜란/곰곰>이란 그림책에서 구체적 이유를 찾았다. 그동안 지내 온 나무의 시간이 보였기에 좋았던 거다.

이른 봄 열리는 나무 시장,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앙상하고 구부정한 느티나무다. 그럼에도 누군가 알아보는 이가 있어 트럭에 실려 간다. 당장 꽃을 볼 수는 없으나 십 년 혹은 그 이후 나무의 모습을 상상하며 선택을 했으리라. 여러 설 중에 늦게 티가 나는 나무여서 느티나무라 했다는 어원을 알고 있어서였을까? 나무는 부지런히 자라 마당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된다. 날 짐승을 품고, 강렬한 햇빛도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사람과 짐승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그러는 사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돌고 돈다는 것도 안다. 나무도 시간과 함께 성장한다.

타인을 보듬을 여력이 생길 정도로 성숙해지지만 늘 제자리에서만 있는 나무! 이 길의 끝, 저 산 너머가 궁금해진다. 먹고 따고 거두느라 바쁜 계절에 그저 잎만 무성함에서 왔을 자괴감과 나무 시장에서 느꼈던 소외감까지 더해 불안에 젖어 있을 때 힘이 되는 말을 듣는다. “너는 천년을 사는 나무란다.”라는 바람의 속삭임이다. 다름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사고를 배운다. 천년이란 시간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걸 알기에 나무는 겨울이 두렵지 않다.

젊음의 시간은 내년에도 여전히 아니 당연히 봄을 맞이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 낙엽을 떨구는 가을이 허무하거나 두렵지 않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본다. 삶의 끝자락을 향해 치닫고 있는 어머님, 노년의 시간에 접어든 나! 가을과 겨울 사이의 시간에 서 있다. 다음 봄이 반드시 본다는 확약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본연의 나를 자꾸 들여다보는 시기다.

만월이 있는 밤이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앙상한 가지에는 오늘을 내일로 보내려는 나무의 소망이 서려 있듯 남아 있는 내 노년의 시간은 미래로, 내 아이들의 시간으로 보내는 바탕이 되게 하려 한다. 조마조마함과 걱정 서린 눈으로 자식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래, 이만하면 됐어 안심하는 맘으로 보려 한다.

그리하면 나의 아이들, 나의 남편 그리고 책과 함께 춤추며 오늘을 어제로 보내기도, 오늘을 내일로 보내려는 나의 삶이 깃든 글을 쓰는 `나는 나야!'라고 바람에게 속살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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