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재, 중단할 수 없는 슬픔
49재, 중단할 수 없는 슬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1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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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글을 읽다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꼼짝을 못할 때가 있다. 가슴이 꽉 막히고 머릿속은 멍해져서 그 이후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어떤 동작도 취할 수 없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책 <인생의 역사>는 `공무도하가'를 비롯해 베르톨트 브레히트에 이르기까지 주옥같은 스물다섯 편의 시에 담긴 인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풀어간다. `5천 명'의 집단화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소중한 객관적 개체화의 극히 사람다운 `도리'를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타케시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온몸이 얼어붙었다.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가운데 가장 절절한 것으로 `단장(斷腸)'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말은 없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복기하여 깨달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빼앗긴 새끼와의 별리를 통곡하다가, 절규하다가 끝내 갈기갈기 창자가 끊어져 죽은 어미 원숭이의 처절함. 그 잔혹함은 차마 `사람'을 상대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 슬픔에 `부검'을 하자고 덤벼들 만큼 `짐승만도 못한' 파렴치는 적어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없을 것이고, 그 대상이 절대로 사람일 수는 없다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은 간절하다. 상례(喪禮)는 대체로 유교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나, 장례를 치른 후 사실상 별리의 마지막 탈상은 불교에서 유래된 49재를 따른다.

158명이 목숨을 잃은 10.29 이태원 참사보다 `한 사람이 죽은 사건 158개'가 사슬처럼 옥죄고 있는 비극의 날로부터 49일째가 되는 16일까지 기타노 타케시의 문장은 우리를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없게 하는 멍에가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일곱 번의 7일을 지내고 있고, 아직 슬픔을 거둘 수 없다. 그러기에는 책임도 원인도, 그리고 숱하게 거듭되는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여전하고 견고한 무책임과 무대책의 세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세의 희노애락과 인연의 절절한 끈을 마침내 두루 놓아버리고, 더 좋은, 더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세상으로 환생하기를 기원하는 49재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아직 우리가 피안의 별리를 약속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한 사람이 이승에서 멀어져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죽음은 한 사람의 우주가 완전하게 닫히는 일이다. 그 한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만들어지고 머물던 우주는 절대로 그 사람 혼자의 몫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 비롯되는 우주는, 그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세계가 사라지지 못하고 고스란히 남아있다. 죽음은 그 한 사람에게 쏟아내는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었던 부모와 형제,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전혀 다른 우주와의 조우를 피할 수 없는 모진 삶의 시작일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한 사람과 생전에 인연을 가졌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도 온전하게 버티기가 쉽지 않은 파괴된 우주의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158명의 모든 죽음이 낱낱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158명과 얽힌 인연이 아니어도 남아있는 모든 생명이 두루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하냥 슬퍼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극락왕생을 간절히 기원하는 49재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 마음 편하게 158명의 영혼이 건강하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환생을 위해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도 없다.

숱하게 되풀이되는 비극은 살아남은 우리가 여태 모든 죽음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멀리하거나 중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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