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책
겨울산책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2.12.0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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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후박나무를 흔들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마지막 남은 잎이 앙탈하듯, 애원하듯 끈을 놓지 못하다가 기어코 똑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졌는데도 성이 덜 찬 것일까? 삭풍은 앙상한 빈 가지를 마구 흔들어 대고 힘없이 떨어진 낙엽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좁은 산길마저 지우고 있다. 잔인한 바람.

여름과 겨울은 길어지고 봄과 가을은 오는 듯 가버린다 하였으나 의외로 올 가을은 긴 편이었다. 가을이 길었다는 것은 겨울이 천천히 왔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느긋하게 가을걷이를 마칠 수 있었다. 이제 참았던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많이 참았던 겨울의 시작. 시작치고는 신고식이 맵다.

바람이 올려 부치는 언덕 농장위쪽에 의병장 반인후의 묘소가 있다. 나의 선조시다. 임진전쟁 초기 선조는 신입 장군을 내려 보내 남한강에 배수진을 치고 적진을 막으려 했다. 당시 조선군은 약 2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었으나 일본군의 조총에 재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충주에서는 조웅이 이끄는 의병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괴롭혔다.

그는 중봉이 매우 신임한 인물로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충주 앙성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막아 퇴각시켰다. 지방학계에서는 임진전쟁 기의(起義) 시초를 곽재우의 기병으로 보던 견해를 충주 조웅의 항전으로 수정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의병들이 참가했다. 충주 음성지역에 살던 선비들은 의병들을 모아 일본군의 진입로인 조령에서도 항쟁을 한다. 당시 음성에 살던 선비 반인후(潘仁後)는 아들 반운익(潘雲翼)과 함께 의병들을 규합, 이 전투에 참가했다. 조령 싸움에서 의병장 반인후는 부상을 입고 아들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됐다. 반의병장은 이 싸움에서 자신이 죽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음성 의병장 반인후의 기의는 조웅 보다 수개월 앞서고 있다. 반인후의 공로는 선조 때 조정에 알려지고 부자(父子)에게 선무원종공신 3등 직급을 받았다. 반인후 의병장의 역사적 사실은 선조 때 받은 공신녹권이 찾아짐으로써 그 사실이 확인됐다고 김재준은 말하고 있다.

또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바로 의병장 반인후의 후손이다. 반 총장은 외교부장관 시절 조상인 반인후 의병장의 녹권을 찾았을 때 매우 기뻐하면서도 이를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겸허한 성품의 반 총장은 조상의 업적을 자랑하는 허세를 싫어한 때문이라고 했다.

돌 많고, 바람 많고, 물 많은 농장은 기가 센 곳이다. 아마 이것은 의병장 반인후의 기가 모인 곳이리라 생각하곤 한다.

손자 손녀는 농장에 오면 제일먼저 이 묘소에 오른다. 아이들이 묘소에 대해 묻곤 하는데, 설명해봤자 4살, 여섯살 박이들이 알아들을 순 없을 테고 그저 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워 계신 곳이라고 하면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에 또 할아버지?'한다. 그리곤 음성 천 개울건너, 능끝 들 건너의 읍내를 향해 `야호- 야호-를 외쳐대는 것이다.

반인후의 묘소를 찾는 건 아이들과 우리식구와 종친들만이 아니다. 음성천을 따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르곤 한다.

이곳까지 오려면 음성천을 건너야 하는데 그들을 위하여 음성군에서 다리를 놓아 준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다.

의병장의 묘소에 와서 구국의 일념으로 조국을 위해 싸운 선열의 얼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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