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마지막 잎새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12.0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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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미미하게나마 부는 바람에 하늘거리던 잎은 한순간 온데간데없다. 연일 스산한 바람이 모조리 잎을 떨군 가지만을 성가시게 건드린다. 괜스레 잎에 찝쩍거리던 바람은 잔뜩 찬 심통으로 가지를 힘껏 건드려 본다. 그러나 가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가지 끝에 무언가를 달고 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홍색의 주먹만 한 덩어리를 달고 있다. 가지 끝에 무거운 것을 달고 있으니 바람에 응하며 함께 할 수 없는 노릇일 터, 바람은 토라지고 자리를 비껴간다. 어쩔 수 없이 여름내 찾아와 놀아주던 바람을 보낸다.

그런 가지가 갑자기 흔들리고 있다. 무언가를 낚아챌 듯 위아래로 마구 흔들린다. 분명 주홍색의 감이었는데 별안간 까무퇴퇴한 것이 주홍색을 가렸다. 대낮에 월식, 아니 홍식인가? 루어낚시에서 트위칭도 저리 정신없진 않을 터, 새벽 동이 트면서 난리 치던 녀석들의 떼거리 등장이다. 부리로 연신 홍시를 쪼고, 꼬리는 감격에 부르르 떨고 있다. 꼬리만 봤을 때는 덩치가 곱빼기가 된 곤줄박이인 듯 보인다. 대낮에 만찬을 성대하고 요란스럽게 치르고 있다.

먹는 것 보다 떨어지는 것이 더 많다. 완전 묵사발이다. 그나마 수북하게 쌓인 낙엽 위에 떨어진 감은 그나마 형태를 가늠해 볼 정도. 잎은 뭔 죄인 지? 이제 좀 쉴만하니 정신없이 떨어지는 감에 혼이 빠진 낙엽. 여름 내내 열심히 일해 감을 키웠건만, 세례를 묵사발이 된 감으로 받는다.

여름내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잎이, 별안간 폭탄 세례를 받다 보니 정신이 없다. 그나마 나뭇가지 안으로 들어온 잎은 장단에 맞춰 놀지만, 도로로 비켜나간 잎은 말 그대로 천덕꾸러기 신세, 터진 감에 잎은 도로에 제대로 붙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쏜살같이 지나는 차에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다 커다란 자루에 모인다. 할 일 없는 것들의 집합소다.

해마다 돋는 잎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꽃이 피거나 꽃비가 내릴 때의 낭만에 사랑을 받지 못한다. 낙엽을 태우며 맡는 냄새 따위의 호사는 있을 수 없는 일. 커다란 포대 자루에 담겨 어디론 가로 옮겨지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포대가 채워질 때까지 한데서 지낸다.

에두를 것 없이 늘 관심 밖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화사한 꽃이던, 탐스런 꽃이던, 앙증맞은 꽃이던 꽃이 피고 열매를 달게 하기까지 당연히 잎의 몫이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역할은 크다. 나무는 매해 잎을 달고 떨구며 몸집을 키워 나간다. 연륜의 덩치는 해를 거듭하며 덩치를 키워 나간다. 그러며 더 많은 잎을 단다. 초년생의 나무는 열매를 달아도 키우지 않고 제거한다. 다 자란 나무여도 열매를 솎아내거나 상품성이 없는 열매는 제거한다. 그러나 벌레 먹은 잎, 가시에 찔려 찢어진 잎은 중간이 말리고 뒤틀려도 더 도톰하게 형태를 바꾸며 제구실을 하기에 잎은 제거하지는 않는다. 많은 잎은 양분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 꽃이 더 화려하고 열매를 실하게, 다부진 나무를 키워내는 일을 한다. 뿌리도 매한가지다. 가장 끝에서 끝을 잇는 관심 밖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 할 뿐이다.

모든 잎이 일제히 떨어져 있는데 마지막 잎새가 빙그르르 돌고 있다. 손으로 까집어 본다. 어느 벌레인가 내년에 부화할 알을 까 놓았을까 싶었다. 다행인지 알의 흔적은 없었다. 손으로 잡아당겼다. 질긴 여러 갈래의 거미줄이 바싹 마른 잎을 쉽사리 놓아주질 않는다. 거미줄에 딸려오던 가지가 줄이 끊어지면서 하늘로 솟구친다. 가지를 성가시게 하긴 했지만, 잎의 위치는 허공의 찬 바람을 맞기보다는 여럿이 모인 땅바닥이 좋을 듯하다. 여럿이 함께 모여 겨울을 이겨낼 나무를 보호하는 일. 그러다 날이 지나며 삭고 흙 속에 스며들어 거름이 될 터이다. 새로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게 할 튼튼한 나무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마지막 잎새는 가장 낮은 곳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제 역할을 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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