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갈대와 억새처럼
우리도 갈대와 억새처럼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11.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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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가로수의 잎들이 다 떨어 졌다. 큰 나무들이 빈 몸이 되자 비로소 자신의 시간이 된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키 작은 억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을 태양 빛을 받아서일까. 초가을의 억새는 은비늘도 붉은 빛을 담았었다. 그런데 어느새 계절이 깊어지니 은비늘의 꽃들도 하얗게 부풀었다. 꽃 하나하나는 너무도 빈약하지만 긴 줄기를 따라 바투 피어난 꽃들은 화려하게 무리를 이룬다. 같은 길임에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계절에 따라 색과 모습이 이리 달라지니 자연의 이치에 놀라울 뿐이다.

아주 오래전 초가을 무렵, 남편을 따라 들에 갔던 일이 생각이 난다. 밭둑에 억새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었다. 아직 꽃이 활짝 피기전의 억새는 약간 붉은 빛이 도는 은빛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한 거듬 꺾어 집으로 돌아와 꽃병에 꽂아 놓았다. 하지만 방안에 꽂아 놓은 억새는 빠르게 꽃을 활짝 피우는 바람에 꽃이 이리저리 날려 결국 치워버리고 말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갈대라고 생각했다. 그게 억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찮은 기회였다.

벌써 10년은 되었지 싶다.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민둥산에 핀 억새를 보기 위해 그곳을 찾은 때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운행을 하고 있겠지만 철도청에서 기차로 전국의 유명 관광지 여행을 갈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었다. 우리가 참여했던 민둥산 억새 축제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기차는 그 긴 칸칸에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은 산의 단풍들과 어우러져 민둥산 정상을 향해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나는 산을 오르면서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먹은 달걀이 아무래도 탈이 난 모양이었다. 산길은 또 얼마나 가파른지 겨우겨우 네발로 기다시피 올라간 정상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황홀한 억새밭의 경치에 일행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나는 가슴을 쥐여 짜는 고통에 억새밭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했다. 그게 천운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 마침 우리 옆에서 쉬고 있던 팀 중에 의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찰을 해 주고는 비상약을 물과 함께 건네주었다. 약을 먹고 진정이 된 후에야 나는 간신히 산을 내려 올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민둥산의 억새는 내게는 그리 좋은 기억은 없다. 다만 내 주위에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던 억새의 따뜻함과 의사의 고마움이 더 깊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 가족여행으로 갔던 여수 순천만 갈대밭의 풍경은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드넓은 순천만 습지를 가득 채운 갈대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갈대사이를 걸어 다닐 수 있게끔 설치한 데코 길에서 만난 망둑어와 작은 게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아직도 남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몸이 온전해야 마음도 열리는 모양이다.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은 그대로 거기 있는 것을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따라 평가를 하니 말이다.

갈대와 억새, 사실 정확히 구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하다. 갈대와 억새는 비슷해 보이지만 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점이 많다. 먼저 갈대는 주로 서식지가 호수나 개천과 같은 물가 주변이라면, 억새는 산이나 들과 같은 메마른 땅을 좋아한다. 또한 갈대는 줄기의 속이 비어 있지만, 굵어서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억새는 줄기의 속은 차있으나 가늘어 약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꽃도 억새보다 갈대꽃이 크고 부해 보인다. 사실 갈대와 억새를 혼동하는 이유는 피는 시기도 비슷하고 어느 곳에서는 갈대와 억새가 같이 어울려 피어 있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긴 줄기로 인해 이리저리 쏠려 다니는 모습도 비슷하다.

그런데 갈대면 어떻고 억새면 어떨까. 가을이면 산과 들, 개천 호숫가에서 바람이 부는 데로 흔들흔들 사람들의 마음을 흔흔하게 하는 것은 매 한가지가 아니던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시를 지은 시인은 갈잎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억새와 갈대가 부르는 노래를 듣기 위해 찾아다니는 것일 게다. 어느덧, 12월이 코앞이다. 겨울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잠깐이라도 바람이 지휘하는 갈대와 억새의 노래를 들으러 근처 호숫가에라도 나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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