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병의 표상 `의병 홍사구'를 아시나요
제천의병의 표상 `의병 홍사구'를 아시나요
  • 김명철 제천교육장
  • 승인 2022.11.21 1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제천교육장
김명철 제천교육장

 

지난 9일 제천시 화산동의 남산 일대에 의병공원과 마을창작소가 개관했다.

이곳은 1896년 의암 유인석 선생이 이끄는 제천의병이 일제와 격전을 벌인 곳이며, 의병 홍사구(洪思九 1878-1896)가 19세의 나이에 스승 안승우와 함께 일본군과의 격전 끝에 전사한 곳이다.

홍사구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가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싸운 삼학사 홍익한의 후손으로 고종 12년(1875년)에 경북 영주(순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모친을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다고 한다. 결혼 후에 제천에서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안승우라는 선비에게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는 홍사구의 정성에 감복한 스승 안승우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홍사구는 학문이 성장하고 품성이 공명정대하고 신의를 존중하니 주위 사람들은 그 위인 됨에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컸다.'라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왜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스승인 안승우가 유인석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른바 전국에서 최초로 을미의병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제자인 홍사구는 스승을 도와 중군장이 되어 전투에 임하였다. 1896년 1월에 제천의병은 왜병 1천여명이 주둔한 충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수안보 전투에서 참모급 장수들이 전사하여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다시 제천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1896년 5월 25일의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왜군의 앞잡이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때 하필 폭풍우가 쏟아져 열악한 무기를 가진 의병들은 조총에 화약을 다져 넣을 수가 없고 화승에 불이 꺼져 탄환이 나갈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안전지대에 있는 일본군은 엄청난 화력으로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안타깝게도 의병부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홍사구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끝까지 분전하였다. 스승 안승우는 제자인 홍사구에게 피하라고 명령하며 후일을 도모하기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사구는 “스승이 죽음에 이르렀는데 제자가 어찌 홀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장수가 위태로움을 당했는데 따르는 군사가 어찌 홀로 죽음을 면하려 하겠습니까. 지하에서도 스승님을 모시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자신의 자리에서 끝까지 전투를 계속하였다.

스승인 안승우는 제자인 홍사구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가다가 다리에 총을 맞게 되었다. 이때 홍사구는 다리를 다친 스승을 부축하고 함께 싸우다가 왜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군에게 사로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고는 왜병들에게 끝까지 저항하다가 홍의사와 안승우 두 사람 다 죽고 말았다.

이때 홍사구의 나이 19세였다. 제자의 도리를 다하고, 조국을 지키다가 전사한 애국 소년의 충성과 도리는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홍사구의 죽음을 듣고 통탄해 하던 동지들이 적진에 들어가 시체를 거두어 본가로 돌아와서 장사하였다. 몇 차례 묘소가 옮겨졌다가 지금은 모산동 순국선열 묘역에 모셔져 있다. 홍사구 의병은 을미의병 육의사 가운데 한 분으로 인정하여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항전 127년 만에 의병의 넋을 기리는 의병공원이 제천 남산에 만들어져서 늦은 감이 있다.

그렇지만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승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홍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이름없는 의병의 넋과 정신이 서린 이곳이 제천의 정신적인 성지가 되길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