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넘는 야사고개
웃고 넘는 야사고개
  • 김경수 시조시인
  • 승인 2022.11.0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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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수 시조시인
김경수 시조시인

 

장마비가 며칠 째 추적추적 어수선하게 내리고 박명원의 입에선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얼마 전 왕에게 큰소리를 치며 한 약속 때문이었다. 더구나 사촌조카 딸이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비록 왕의 고모부가 된다지만 어디까지나 왕은 왕이었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헛소리로 왕을 능멸하는 이유가 붙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종묘사직이 어쩌구 후사가 저쩌구 하면서 왕실이 안정되어야 한다며 걱정하듯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왕은 박명원의 조르는 듯한 주청을 못 이기는 척 받아주었다. 왕이 승낙하자 박명원은 기뻐하며 심중에 두고 있던 조카딸 얘기를 꺼내었던 것이었다. 박명원은 곧장 사촌에게 달려가 혼사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런데 기뻐할 줄 알았던 사촌이 반대가 몹시 심했다. 박명원은 실망이 컸다. 모두가 궁궐에서 왕비가 되어 사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박명원은 억지로 싫다는 것을 매달릴 수도 없었다. 박명원은 그 날부터 속을 끓이기 시작했다. 왕에게 친척이라 말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다른 규수를 고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박명원이 골머리를 끙끙거리며 앓고 있는데 여주에서 박생원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박명원은 가뜩이나 심란한데 차마 박절하게 사람을 대할 수가 없어 귀찮지만 그를 맞이하였다. 박생원은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었다. 박명원은 이 장마에 어인 일이냐고 묻자 박생원은 울상을 지으며 실은 이번 장마로 살림살이가 홍수에 다 씻겨가고 말았다고 했다. 그래서 살길이 막막하여 무작정 식솔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 오긴 했지만 당장 거처 할 곳도 없고 해서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박명원은 우두커니 말만 듣고 있는데 박생원이 중얼거렸다. 이제 곧 어두워 질텐데 다 큰 딸자식을 그런 곳에 두고 와서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순간 딸이라는 말에 박명원의 귀가 번쩍 뜨이며 딸아이의 나이를 물었다. 박생원은 열아홉이라면서 가난이라는 이유로 혼처를 걱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박명원의 마음이 급해졌다. 박명원은 잘만하면 체면은 세울 것 같아서였다.

얼마 후 박생원의 딸만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박생원의 딸을 본 박명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이 진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어느 양갓집 규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와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박명원의 입에서는 연신 웃음이 배어나왔다. 며칠 후 박명원은 왕을 알현했다. 왕은 박명원이 추천을 한 박생원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 들였다. 박생원 일가가 장마 통에 모든 것을 잃고 박명원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우연한 조화로 하루아침에 후궁이 된 그녀는 다름 아닌 정조의 셋째부인 수빈 박씨였다. 또한 그녀는 바로 조선의 23대 왕인 순조의 어머니였다.

한편의 야사를 꺼내 보다가 마치 불행이 요행에 의해서 행운으로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간혹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맞이하려면 그만한 조건을 갖추어야 할 것이고 또한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어떠한 계기가 주어지고 기회가 다가왔을 때 조화가 이루어져 행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행운은 그냥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자만이 주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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