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간 항아리 같은 딸
금이 간 항아리 같은 딸
  • 임현택 수필가·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2.11.0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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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수필가·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가을이 머문 자리.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보가 터져 깔깔거렸던 사춘기 시절, 떨어진 낙엽을 주워 책갈피 속에 꼭꼭 눌러 보관했었다. 이젠 그 기억조차도 가물가물한 그때, 빛바랜 낙엽은 어느새 허연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중년으로 만들었다. 단풍보다 더 붉은 점퍼를 입고 수채화처럼 물든 이 가을, 지나온 길을 회상하며 무작정 길을 떠났다. 굽이굽이 깊은 산세와 어우러진 계곡, 급물살을 타고 산허리를 돌아치던 물살은 퍼렇게 멍이 들도록 통곡하듯 떨어지는 폭포는 나의 아픔을 토해내듯 하얗게 부서진다.

딸 부잣집인 우리 집, 아버진 언제나 아들이 우선순위였다. 생활뿐만 아니라 학업은 물론 모든 것이 아들, 아들이었다. 딸들도 어여쁘셨을 텐데 보물 항아리 같은 장남, 장손은 무조건 최우선이며 최고였다. 옆도 뒤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눈앞에 있는 보물 같은 아들만 보이셨으니 딸들은 채워지지 않는 금이 간 항아리 신세였다. 남아선호 사상 때문일까? 당시 딸들은 무뎌진 세월 속에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리 여기면서도 때때로 홀대받은 딸들은 아들만 살뜰하게 챙기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야속하고 미웠다. 장녀는 장녀여서 어여쁘고, 셋째 딸은 선도 보지 않을 만큼 여쁘다는 명분으로 막내딸은 막내여서 예쁨을 독차지했다. 둘째인 난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인 체 이리저리 밀치는 신세로 더 열심히 살았다. 보물이라 일컫는 아들이 뭔지! 자연스레 딸들은 독립적인 생활을 스스로 개척하며 동화 `금이 간 항아리'이야기처럼 열심히 살았다.

동화 속 어느 남자가 양 어깨에 각각 하나씩 항아리를 지고 물을 날랐다. 오른쪽 멀쩡한 항아리와 금이 간 왼쪽 항아리였다. 물을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왼쪽은 금이 간 항아리여서 물을 가득 채워도 언제나 항아리는 반쯤 비어 있었다. 반면 오른쪽 항아리는 늘 찰랑찰랑 가득 찬 모습 그대로였다. 금이 간 항아리는 주인에게 늘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항아리를 교체할 것을 요청했다. 그때 주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도 네가 금이 간 항아리여서 물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단다. 그러나 지나 온 길을 보거라 네가 물을 주고 왔기 때문에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았느냐'하시는 것이었다. 금이 간 항아리 덕분에 아름답고 무성하게 자란 꽃과 들풀이 핀 것을 보고 주인장은 흐뭇해하셨다. 주인장은 눈앞에 편리함과 완벽함 보다는 부족함이 오히려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슬기로운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 집, 보물 항아리 같은 아들은 늘 풍족했고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한 시원한 물이 찰랑거렸고, 금이 간 것 같은 딸들의 항아리는 줄줄 새어나가는 물로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공평했다. 금이 간 항아리처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삶인 줄 알았건만 끈덕진 삶은 자생력과 의지력이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매우 모질고 끈덕진 하게 살았다. 그렇게 금이 간 항아리라 여기며 억척스럽게 살다 보니 윤택해진 청년시절, 운명인 듯 숙명인 듯 나는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 돌봄까지 도맡으며 행복한 행보를 다졌다.

딸들은 아버지가 홀대한다고 생각했는데 외려 강하게 키우셨던 것이다. 때문에 사막에서 꽃을 피울 만큼 강해졌고 재주 많은 딸이 되었다. 돌이켜보니 아들은 아들이어서 귀했고 딸들은 딸이어서 `귀한 자식일수록 회초리를 들라'라는 말씀처럼 강하게 키우셨던 것이다. 가을이 지나가는 이 자리,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보니 철이 드나 보다. 이제야 아버지의 깊고 깊은 속내가 아리게 파고든다. 찰리체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다. 이 가을, 비극이 아닌 찬란한 희극이 아름답게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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