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
가을걷이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2.11.0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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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가을 들판이 분주하다. 며칠 전만 해도 누렇게 익은 벼들이 들을 가득 채웠는데 콤바인이 논배미들을 분주하게 오가며 알곡을 거둬들이고 차츰 벼를 수확한 빈 논들이 늘어난다. 수확을 마친 논으로 먹을 것을 찾아 한 무리 새들이 날아든다. 허수아비도 빈 논에 새들이 드나들도록 인심 좋게 눈감아 주는듯하다. 이미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콩꼬투리를 주렁주렁 달고 추수하기를 기다리던 콩밭에도 손길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운 가을 풍경이다.

추수 때가 되면 농부의 수고로움을 생각하게 된다. 봄부터 가을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을지 짐작하기 때문이다. 농부를 도와 여름내 논에 들어가 친환경 작물을 기르도록 부지런히 해충을 잡아먹고 논바닥을 헤집던 오리, 미꾸라지, 우렁이도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미 퇴장하였나 보다. 알곡이 잘 영글기까지 농부의 발걸음이나 바람, 햇볕, 촉촉하게 내려주는 비 등 모든 것이 농작물에 영향을 준 덕이다. 그뿐이랴. 논 가를 지나는 길손들도 자라는 곡식을 보며 잘 자라라는 따뜻한 마음을 보태어 더욱 튼실히 여물게 했을 터이다.

전문 농사꾼은 아니지만, 우리 밭에도 추수를 마쳤다. 고구마를 캐고 들깨를 베어 며칠 말린 다음, 밭 가에 넓은 천막을 깔고 들깨를 털었다. 들깨 수확하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농사를 많이 짓는 농가에서는 기계로 들깨를 털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그럴 만큼 양이 많지 않고 기계도 없으니 도리깨를 이용하여 수작업으로 하였다. 옆 밭에도 연로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종일 혼자서 막대기로 깻단을 두드리고 계셨다. 매번 추수할 때 마음은 다음 해에는 뭐든 조금만 농사를 짓자고 다짐하지만 봄이면 또다시 물욕을 내곤 한다.

지난봄에 씨를 뿌리지도 않은 밭 한 곳에 호박 싹이 소복이 자리를 잡았었다. 작년에 제대로 여물지 않아 거두지 않은 호박에서 싹을 틔운 모양이었다. 대추나무가 자라고 있는 밭이지만 서로 피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은 잘못이었다. 호박 줄기는 밭 한 귀퉁이를 온통 점령하고 어린 대추나무를 휘감고 올라가기도 하고 날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뻗어가기 좋아하는 호박 넝쿨손은 대추나무를 휘감아 옴짝달싹 못하게 하여 볼 때마다 넝쿨을 떼어내곤 했다. 덕분에 호박은 이웃과도 풍성하게 나눌 만큼 풍요로움을 주었다.

추수 때는 몸도 마음도 바쁘다. 일손을 기다리는 작물은 많고 일할 사람은 부족하다 보니 예전에 어른들이 `가을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고' 하시던 말씀이 실감이 난다. 풋고추나 가지, 애호박 등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두어야 하는데 짧은 가을날에 밭을 오가며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미처 수확하지 못한 여린 작물들이 속수무책 서리를 맞았다. 갑자기 내린 서리에 호박잎은 얼었다가 푸른빛을 잃고 검게 변하여 축 늘어졌다. 기세등등하던 넝쿨들도 본연의 색을 잃어버렸다. 울창하던 잎들이 듬성듬성 시들어 버리자 호박잎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아직 푸른빛이 남아있는 덜 익은 호박이 큰 몸통을 드러냈다. 늦게 열매 맺은 호박을 마지막까지 힘을 다해 이렇게 익혀가고 있는 줄은 몰랐다.

덜 익은 호박을 거두어들였다. 햇볕 많이 드는 거실 한쪽에 놓아두면 스스로 익어갈 터이다. 계절의 순환을 보며 마음이 겸허해진다. 우리 삶에도 언제 겨울이 성큼 다가올지 모를 일이다. 안과 밖으로 미비한 성정을 좀 더 익혀가는 가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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