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앞에서
풀꽃 앞에서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2.10.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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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이른 봄이었다.

흙 한 줌 없는 콘크리트 바닥과 벽 사이 작은 틈으로 여린 싹이 돋아났다.

한여름 열기에도 시들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지킨 풀꽃의 생명력에 이름이 궁금했다. 풀꽃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세히 보니 고들빼기였다. 풀벌레 소리 들리는 추분까지 피고 지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줄기에는 목심이 박혀 나무처럼 튼튼하다. 줄기마다 노란 꽃이 피었고, 꽃 진 자리에 씨앗이 여물어 하얀 솜털을 달고 바람결에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지난여름의 아스팔트 열기는 여린 꽃을 녹일 만큼 뜨거웠다.

작은 실뿌리는 한 모금의 물을 찾아 더욱 깊이 내려갔으며, 새벽이슬로 겨우 연명했다.

폭염 뒤에 찾아온 긴 장마는 겨우 지탱하던 생명을 지울 기세였다. 몰아치던 태풍과 억수 같은 빗줄기에도 몸을 깊게 숙였을 뿐 풀꽃은 삶의 끈을 쉽사리 놓지 않았다. 풀꽃을 보면서 열악한 상황에 맞서 적극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내 삶은 지금보다 나아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춘기로 접어들 무렵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다섯 명의 이복동생들은 소질을 찾아 거침없이 내달리고, 새어머니의 뒷바라지는 열정적이었다.

동생들에게는 그 따뜻하던 눈빛도 내게까지 와닿지는 않았다. 설 자리를 잃은 나는 어느 곳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올 때는 내게만 냉랭한 집안 분위기가 떠올라 지붕만 보여도 쭈뼛 머리가 서고는 했다. 꼭 필요한 소지품 하나 살 돈을 타내기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일을 돕던 언니가 나가버렸다. 언니가 하던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나는 가출을 감행했다.

가출했지만, 갈 곳이 없던 나는 무작정 고향을 찾아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모두 음성으로 이사한 후였다.

고향 집은 먼 친척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와 나의 사랑이 구석구석 배인 곳, 마당으로 들어서자 눈에 익은 사물들이 달려와 나를 와락 안아주는 것 같았다.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이었다. 내 처지를 들은 친구가 함께 부평의 봉제공장에 가자고 했다.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내가 무수히 많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고, 제각각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은 채 빵 하나로 허기를 채우며 야간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항상 봉급이 모자라던 친구들과 달리 나는 착실히 돈을 모았다. 열심히 돈을 모아 중단했던 공부를 할 참이었다.

선생님이 되면 좋겠지만 어떻게든 지금의 나로 주저앉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밤이면 군인들의 숙소처럼 양쪽으로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친한 사람끼리 마음을 나누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3년, 내가 세상을 보는 마음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동생들은 순조롭게 제 꿈을 키워나갔다.

외국으로 유학하러 가는 동생, 서울의 명문대로 진학하는 동생, 그중 교원대로 진학한 남동생이 제일 부러웠다.

동생과 달리 내 꿈은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 꿈은 상상으로도 닿을 수 없게 멀어져 갔다.

먼 길을 돌아 결혼하고 엄마가 되어서야 학업을 마쳤다. 직장을 얻어 17년간 공무를 수행하고 퇴직했다. 지금은 아이들과 숲의 비밀을 공유하는 숲 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 꿈을 담아 흩날리는 풀꽃을 바라보며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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