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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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2.09.2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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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그가 외교통상부장관 시절의 일이다. 조부 묘에 벌초를 하러 능모링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의 군수, 의장, 교육장, 경찰서장 등이 동래에 아침 일찌감치 들이닥쳤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그들이 큰 형님께 물었는데 “아 반기문 대부님은 좀 전에 벌초를 마치고 가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모두가 어리둥절했단다.

반기문 당시 장관은 연식이 오래된 구형 소나타를 타고 왔는데 아무도 그가 장관이었는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수행원도 없이 아들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왔었으니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소탈하고 검소함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단면이다.

반기문은 광주반씨 20세손으로 나와는 행렬상 할아버지뻘이다. 1944년 6월 13일 대한민국 음성 원남면 행치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외교관을 꿈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외국학생의 미국방문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것이 그의 외교관 인생을 결정짓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2006년 10월 13일 192개 유엔 회원국으로부터 만장일치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그가 국제정치의 본산지인 유엔의 수장 자리에 오른 것은 한국 외교사를 빛내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는 제7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으며 제8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이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1985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외무부(지금의 외교통상부)에 들어가며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76년 주인도대사관 1등 서기관을 지냈고 1987년 주미국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를 지냈다. 1990년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외무부 장관특별보좌관, 1995년 외무부 외교정책실장을 지냈으며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 대통령비서실 의전 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998년 주오스트리아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1년 제56차 유엔총회 의장비서실 실장, 2002년 외교통상부 본부대사를 지냈다. 2003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을 지내고 2004년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에 올랐다. 2007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정식 외교관의 생활에 들어섰을 때 는 주미대사관에 발령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가난했던 그는 생활비가 비싼 미국보다는 후진국에 가서 돈을 아껴 집안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도 뉴델리 총영사관 근무를 지원했다. 이후 뛰어난 업무능력을 인정받으며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했다.

순탄하던 그의 공직생활에도 위기가 있었다. 2001년 2월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미국 부시 행정부가 폐기를 주장하던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ABM) 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하자는 문장이 포함되며 한·미간에 큰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차관의 자리에서 경질되며 큰 충격에 빠졌다.

전화위복이 된 것은 당시 유엔총회 의장을 겸하던 한승수 외교부 장관의 발탁으로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겸 주 유엔대표 부대사로 임명된 일이다. 직

급상으로 보면 좌천되는 인사였지만 그는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였고 이로써 그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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