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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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 승인 2022.09.2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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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나는 비가 좋다. 쏟아지는 비 말고 그냥 촉촉하게 하루쯤 종일 내리는 장맛비를 참 좋아한다. 또 보통 어지간한 비 내림엔 우산도 쓰지 않는다. 혹 제법 내리면 걸음을 재촉하거나 뛰는 정도? 아니면 그냥 맞는다. 아스팔트나 땅이 비에 젖어 훅~ 들어오는 먼지 냄새도 참 좋다.

대학 때니까 35년쯤 넘은 기억이다. 평소 나를 많이 아껴주던 선배와 여름날 지역 외곽 `운보의 집'을 갔다.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버스로 굽이굽이 시골길 찾는 재미도 나름 나쁘진 않았다. 둘 다 미술 전공을 했으니 운보 김기창 선생님은 워낙 잘 알고 있었고 한적한 날 소풍 가듯 한 놀이였다.

`운보의 집'은 당시 경내가 세련되지 않았지만 소담하게 잘 정돈된 곳이었다. 안마당 연못 앞에서 키득키득 떠들다가 대청마루에서 물끄러미 우릴 보고 꾸짖는 운보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시다시피 선생님은 귀가 안 들려 말을 잘 못하시고 그냥 소리 지르듯 뭐라 하신다. “죄송합니다~”하고 얼른 허리 숙여 인사드리니 그냥 멀찍이 보고만 계신다.

머리를 길러 묶고 한복차림으로 앉아계신 풍채가 예사롭지 않다. 선생님께 공손히 인사드리고 경내 여기저기를 산책하듯 걷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조금씩 굵어지더니 바람과 함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리친다. 건물 처마 밑에서 하염없이 기다려도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아름드리 미루나무가 바람에 45도쯤 기울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비로 인해 희뿌연 실루엣만 보이고 나뭇가지들과 나뭇잎은 무서울 만큼 소리를 지른다. 와중에 선배는 카메라로 그 순간을 담는다. `찰칵, 찰칵'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장마'다. 선배와 나는 그제야 큰일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근처 어딘가쯤 선배가 아는 도자기 공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세찬 비바람에 휘청휘청 쓰러질듯한 걸음으로 30여 분을 헤매 겨우 아담한 공방을 찾아냈다. 주인장께서 놀라며 반갑게 맞아주신다. 공방은 여름날인데도 벽난로가 자그맣게 피워져 있다. 아마도 벽난로를 이용해 공방의 습도 조절을 하시는 듯했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도공 선생님은 벽난로에 나무를 한아름 넣으셨다. 웃옷을 벗어 난로 가까이 걸어두고 선생님 작업실을 하나하나 살폈다. 평소 도자기를 그냥 건성으로 보아오던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살펴본 시간이었다. 엄청 큰 것은 정말 위압감을 주기도 했고 소박하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도자기 형태도 있었다. 이제 막 빚어놓은 것과 말리고 있는 작품들, 유약을 발라 하얗게 마른 도자기와 방금 구워낸 반들반들한 도자기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자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이 선배형과 주인장은 오랜만에 만나셨는지 도란도란 소곤거리다가 크게 한 번 웃기를 반복하신다. 두 분 얼굴이 벽난로 열기로 빨그레해지셨다. 벽난로에 바싹 말린 옷의 뽀송한 여운이 아직도 기억에 있다. 잠시 나갔다 들어오시는 도공형님(통성명 후 형님으로)이 쟁반에 항아리를 받쳐 들고 계신다. 크크크 막걸리다. 직접 빚은 술이라며 자랑삼아 내어주신다. 캬~ 정말 그 맛이란…. 공방 밖에는 여전히 비가 한참이다. “형아~ 비 언제 그칠까?” “그러게? 못 가면 내일 가지 뭐~”. “그래요? 그럼 오늘 제대로 한잔해볼까요?” 갑자기 도공형님이 주방으로 뛰어들어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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