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처음처럼
그 처음처럼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09.2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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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아들이 떠났다.

내게서 바람 소리가 났다. 담담하게 보낼 줄 알았는데 집착을 다 내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나보다. 다 큰 자식이어도 여전히 마음이 따라간다. 조금씩 더 멀리 떠날 때마다 언제나 바람이 일었다. 흔들리지 않으려 버티었는데 휘청인다. 어미로서 여물기엔 아직 멀어서인지 이 나이에 성장통이 찾아온다.

비상(飛上)을 위한 날갯짓임을 왜 모르랴. 쓸데없이 걱정을 사서 한다고 나무라는 그이가 밉다. 이런 나를 병이고 주책이라고 하는 그이가 야속하다. 나를 다독여주지 않는 서운함이 울컥 울음으로 넘어온다. 떨어져 있는 거리감만으로도 이렇게 허전한데 남자라서 단순한 건지. `당신은 속도 편해서 참 좋겠다' 혼잣말로 쏘아붙인다.

차로 두 시간이면 올 거리에서도 자주 보지 못했다. 집에 일 년이면 서너 번 왔었지만 타국이라는 거리감만으로도 아득해져 온다. 비행기로 13시간을 날아가야 닿는 그곳은 여기와는 정반대의 시간을 산다. 하루를 시작할 때면 거기는 노을이 지는 시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어떻게 지냈니” 일상을 물어본다. 헷갈릴 때가 많다. 시간이 흘러 향수병을 앓기도 전에 내가 먼저 아들을 향한 그리움으로 앓을 것 같다.

아들이 대면한 이 낯설음은 처음이 아닌 셈이다. 집을 떠나기 시작한 고등학교도, 서울로 간 대학교 때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 동료가 된 군대가 그랬을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한 말이 자신보다 더 대단한 녀석들만 수두룩하다고 했다. 대학생이 되고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같은 녀석들이라고 했다. 그런 소굴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쳤음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박사학위를 딴 후에 죽기 살기로 했노라는 말이 가슴에 박혀 잊히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아들이 짠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아들이다. 지금껏 흐트러지지 않고 잘 견뎌주어 대견하다. 한 번도 속상하게 하거나 실망을 준 적이 없다. 아마도 어미에게 부려본 응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살을 떨고 싶었던 건 아닌지. 행여 멀리서 전화로 투정을 부려오면 어자어자 다 받아주리라.

아들은 새로운 세상을 찍어 보낸다. 밥 먹기 전에 식단을 전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마트도 담아 보낸다. 김치를 샀는데 너무 비싸다고 퉁퉁거린다.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암시다. 내가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게 만들었나 보다. 주객전도가 된 나의 성장통이 욱신거린다.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세계다. 언어도, 문화도 생소한 미지의 땅에서 만난 새로운 삶이 얼마나 떨릴까. 출발의 준비가 필요한 곳에서의 막막함은 또 얼마나 클까. 접하는 것들이 어색하고 낯설어 두렵기도 하고 마음은 긴장으로 날이 서 있을 게 뻔하다.

“처음”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앞으로의 기대가 생기면서 두려움도 따라온다. 더욱이 이 말 앞에 나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좋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신선한 말이다. 나태했던 자신을 부추기고 반성하며 더 성실할 것을 다짐한다. 한 뼘 더 큰 나를 꿈꾸는 마법 같은 단어다. 또 다시 날아오르는 아들을 위해 놓았던 염주를 꺼내든다. 내 손에서 108개의 염주알이 천천히 구르고 있다.

꽃등,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막 밖으로 나온 아기처럼, 그 처음처럼, 첫발을 떼어놓는 아들. 바람이 불어와도 주저하지 말고, 비가 온다고 머뭇거리지 말고 가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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