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백년 죽어 천년일까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일까
  • 임현택 수필가·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2.09.1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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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수필가·괴산문인협회 지부장

 

가을이 오는 길목. 붉디붉은 꽃을 피워 막바지 정열을 불태우는 배롱나무, 멀어지는 여름을 꽉 붙들고 더 붉게 피워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친 듯 맥없이 걸려 있는 달력을 거침없이 뜯어내자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는 백로다. 금세 무겁게 짓누르던 더위가 사그라진 듯 자분자분 발걸음을 따라오던 더위도 한풀 꺾여 산사에 오르는 발걸음도 가볍다.



얼마나 걸었을까? 언덕바지 커다란 느티나무 밑동이 서로 꼭 껴안은 연리근(連理根), 그 앞에 망부석이 되어 한참을 서 있었다. 가지가 붙은 연리지(連理枝)와 줄기가 붙은 연리목(連理木)은 수없이 보았건만 뿌리가 붙은 연리근은 처음이다. 서로 보듬듯 엉키듯 오랜 세월 사찰 입구에서 뿌리를 훤히 드러내 놓은 연리근, 마치 양팔을 벌려 어깨동무하듯 서로 꼭 껴안고 있다. 하세월 동안 사찰을 굽어 지켜온 느티나무 연리근이 참으로 이채롭다.



애틋한 사랑의 상징인 아름드리 연리근이 있는 이곳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안동의 봉정사다. 고즈넉한 경내를 둘러보고 있음에도 어떤 힘에 이끌리듯 연리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소가 되새김질하듯 올칵올칵 토해 낸 기억들이 나를 헤집는다. 오롯이 처음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단청, 덧칠되지 않아 희미하게 퇴색된 단청을 우두커니 보고 있자니 가물가물 희미한 기억 끄트머리에 있는 지인 부부가 나를 잡았다. 희미한 자국임에도 큰 파문이 일며 가슴이 일렁인다.



지인 부부는 연리지를 닮았다. 아니 연리근을 닮았다. 당뇨에 비만환자인 지인, 기저질환자임에도 꼭 반주(飯酒)를 즐기시는 지인은 여걸이시다. 체격도 목소리도 남편보다 더 크고 우렁차다. 반면 부군께서는 마른 체격으로 여린 듯 보이지만 강당이 센 체력으로 당뇨 탓에 불편한 아내를 지극히 돌보신다. 금주를 해야만 하거늘 뚝 끊지 못하는 아내는 남산만 한 배를 끌어안고 지내면서 무엇이 그리 당당한지 여걸의 모습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뒤에서 아내의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처리하시면서 보살펴 주시는 부군, 원앙부부이시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오랜 지병이 악화되어 몸을 가누지 못해 끝내 몸져누운 아내, 자식과 며느리가 있음에도 나이로 인해 당신 몸도 무거운데도 아내를 극진히 간호하셨다. 골골 팔십이라 했는데 몸져누운 지인은 몇 달을 실낱같은 삶을 끈을 부여잡고선 힘겹게 숨을 몰아쉬더니만, 끝내 모두의 가슴에 슬픔만 남겨놓고 한 줌 흙이 되었다.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홀로 떠나셨는지 짝을 잃은 원앙부부는 한쪽 날개가 꺾인 체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계셨다.



배필조라 하는 원앙새‘원’은 수컷‘앙’은 암컷이다. 배필조는 한 쌍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나머지 한 마리는 제짝을 그리다가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지킨 사랑이라는 원앙새, 금슬 좋은 부부를 두고 원앙부부라 하지 않던가. 그래서일까 일주일 만에 또다시 믿을 수 없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세상풍파에도 변함없이 한결같은 분이었는데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더니 모두는 눈과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었다. 어느 구름에 비 들어 있는지 모른다더니 아내를 당신 손으로 더할 수 없이 극진하게 정성을 쏟으셨는데, 아내를 잃은 상심이 크셨던지 부군도 일주일 만에 아내 뒤를 따라가신 것이었다.



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치면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했을까. 오랜 세월동안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두 몸이 하나가 된 사랑의 나무 연리근, 나무의 뿌리는 근원이며 정신이기도 한데 연리근처럼 내세에서 다시 만나 못다 이룬 사랑을 이루시길 염원하고 염원했다.

가을이 오는 길목, 살아 백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처럼 연리근을 닮은 지인 부부의 아릿한 사랑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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