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언덕에서
넓은 언덕에서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2.09.1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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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더위를 피해 산을 찾았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풍력발전기로 전기를 쉼 없이 만드는 바람개비가 우리를 안내하듯 열 지어 서 있다. 1,100m 고지에 섰다. 능선을 타고 부는 바람이 어찌나 찬지 반소매 차림으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남편의 옷깃을 여며주며 산 아래 골짜기를 둘러본다. 이렇게 넓은 들이 있었다니.

끝없이 펼쳐진 배추밭에 바람이 일자, 물결이 일렁이는 듯하다. 푸른 밭 사이로 실금처럼 이어진 길의 끝이 어딘지 궁금했다. 우리는 전망대를 뒤로하고 밭으로 이어진 길을 찾아 들어섰다.

언덕을 넘고 또 넘어가도 배추밭이다. 강원도 고랭지 배추밭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 큰 밭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요즘 폭염과 장마 뒤 우리 밭의 열무와 오이, 채소는 모두 녹아 없어졌다. 옆집 밭도 마찬가지다. 시장에서 배추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배춧값이 금값이다. 한여름 그렇게 귀한 배추가 이곳에서 이리 실하게 속을 채우고 있다니 보기만 해도 대견해 보였다. 경사가 심한 비탈진 밭을 가꾸는 농부들의 노고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넓은 밭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6·25동란이 끝난 1965년 국토는 아직 폐허 상태였다.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지상과제인 시기였다.

정부에서는 식량 증산을 위해 국유림 개간을 허락했다. 그러자 이곳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부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화전을 일구고 돌을 고르는 사람들은 어깨에 멍에를 쓴 소와 한 몸이 되어 쟁기질했다고 한다.

내 할머니도 생의 많은 부분을 여기 화전민들처럼 산비탈을 일구며 보내셨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면 굽은 허리에 커다란 다래끼를 메고 할머니는 재골 밭으로 가셨다.

산은 조금씩 밭이 되었고 밭둑에 돌무더기는 점점 높게 쌓였다. 척박한 돌밭에 콩을 심고 풀 한 포기 없도록 호미를 드셨다.

내가 가끔 들 밥을 들고나가면 당신 입에 넣기 전에 먼저 뭇 생명들에게 한 숟가락 나누고 요기하던 할머니였다.

삼베적삼이 항상 땀에 절어 있었고 날이 어둑해져야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셨다.

그리 정성을 들이는 것은 땅이 곧 가족들의 밥이기 때문이다. 밭둑과 산비탈에 감나무와 밤나무를 심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할머니의 다래끼에서는 산딸기, 오디, 홍시, 알밤 등 철 따라 다른 먹거리가 나왔다. 넓은 밭 언덕에는 멍에 전망대가 있다. 밭을 만들 때 나온 돌로 축대를 쌓았다고 한다.

엄청난 돌담을 보면서 밭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스민 곳인지 생각해본다. 전망대에 멍에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은 소의 어깨에 얹어놓은 멍에를 일컫는다고 했다.

차에서 내려 밭을 살펴본다. 밭고랑마다 크고 작은 돌멩이가 수북하다. 능선의 가파른 비탈에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배추는 여름 태풍이 할퀴고 덮쳐도 흙과 돌과 배추가 서로를 보듬어 크고 있다.

1995년에 들어 정부는 경작자들에게 밭을 모두 매각했다고 한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농기계가 발달하여 밭은 점점 더 넓어지고 귀한 여름 배추는 우리들 밥상에 오르고 있다. 이곳을 안반데기라 하는 것은 지형이 떡메를 치는 안반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안반 같은 넓은 언덕 여름 피서지에서, 유년 시절의 할머니 적삼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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