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의 여름날
칸나의 여름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9.1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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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그래! 네가 내 곁에 있었다.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왕성해서, 뿌리를 땅 밑으로 옆으로 뻗더니 결국 땅 위로까지 올리고 덩이를 키웠었다. 뿌리는 하얗고 뽀얀 속살이 검보라색이 될 때까지 태양의 기운을 빨아들였었지.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던 녀석이었는데.

너무나 광대하게 영역을 넓혀, 일일이 캐어 옮길 수 없어 그 자리에 두고, 얼어 죽을까 걱정되어, 덤불이며 갖가지 우거지로 덮어주었었는데, 애꿎은 겨울바람에 덮개가 날아가 결국 얼어 죽었지. 전멸했다 생각했는데. 지난 한파에 다 죽었다 체념했는데, 이런! 네가 어떻게 거기서? 어떻게 네가? 절대로 멸할 수 없다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돈독했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순을 올렸다. 기억에서 사라지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땅속 깊은 곳에서 흙 속에 섞여 남아있던, 옮길 때 제대로 챙기지 못한 외톨이가 된 녀석이 싹을 틔웠다. 덜 생긴 녀석이 덜떨어지진 않았나 보다.

그런데 넌 어찌 꽃을 피우려 하는가? 다른 녀석들은 한여름 강렬한 태양에 뒤처질세라 불사르고 기세가 한풀 꺾임에 꽃잎을 떨구는데, 넌 아직 온전하게 자라지도 못하고 꽃대를 제대로 올리지도 못했는데, 정상으로 된 형태의 꽃일까 걱정이 된다. 무거운 근심에 언제 완전히 열릴지 모를 꽃망울을 쳐다본다. 애써 조심스럽게 내민 꽃잎은 정지상태다. 근심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무엇인가가 잡는 듯. 녀석을 바라보던 고개는 한쪽 어깨로 치우쳐 멈추었다.

땅거미를 거두어들일 즈음 녀석의 시도는 시간을 멈췄다.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미련스러운 나는 깊게 눌린 발자국을 남긴 채 뒤로 돌아섰다. 끝내 피워내지 못할 것 같은 녀석을 뒤로했다. 녀석을 바라보던 고개는 어깨에서 등으로 붙었다. 달과 구름이 한참 실랑이 중이다. 구름을 헤집은 달이 말갛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멈춰버린 꽃망울을 살핀다. 밤새 얼마나 애달팠던지 살포시 벌린 꽃잎 사이에 물이 잔뜩 고였다. 붉은 꽃잎이 뚱뚱 불어 보인다. 그러다 썩을 것만 같아 손을 내밀어 털어내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느린 동작을 보는 착각을 불러 오를 만큼 꽃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면서 눈물을 밀어내고 있다. 밀어내다 튕기며 터진다.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색이다. 꽃잎이 제대로 형태를 취하지 않았지만, 짙고 깊은 녹색에 강렬한 열정의 태양을 품었다.

그래! 역시 너였구나! 함께 했던 의식에 소리 없는 복원이다. 절대적 색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더 짙은 외침이다. 그렇게 장대했던 강렬했던 색은 시간을 켜켜이 쌓고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힘겹게 피운 붉은 꽃잎이 이슬을 달았다. 붉은 태양이 에너지를 토로하듯 홍염의 끝에 침묵의 순간이다. 크게 확대된 붉은 이슬이 손끝을 만나 손가락 등을 타고 내린다. 고요의 순간이다. 피안의 침묵이다. 전멸에서 한 가닥 희망의 시작이다.

그래! 내가 네 곁에 있다. 구름의 저편으로 아득히 멀어져 갖던, 잊고 있었던 것이 잊지 않고 찾아 주었다. 초췌하고 남루할까 걱정은 멀찌감치,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한 포기 꼿꼿하게 당당히 서 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꽃대를 올렸다. 짧지만 다부지고 화려했던 시간을 오롯이 담았다. 꽃잎의 형태는 온전치 않다. 부분적으로 기형이지만 기세는 제대로 담았다. 햇빛을 뒤로하며 입술을 드러낸다. 또렷하고 말갛다. 강렬한 색에 주변의 꽃들은 다소곳하고 그윽하다. 너무 늦게 순을 올린 터라 제대로 된 행색을 가질 수 없었지 않은가? 그래! 그 찬란했던 여름은 강렬한 열정, 절대로 덧칠할 수 없는 색이고 제지할 수 없는 기세였다. 체념은 잠시였다.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고 죽음으로 몰아선 잘못을 용서하듯 밝게 웃어주는 배려해주는 고마움에 미안할 따름이다. 전멸하지 않고 살려고 싹을 틔운 고마움에 그날의 화려했던 너의 열정에 나 또한 더한 정성으로 함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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