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雜草)
잡초(雜草)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1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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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혼자 영화 `한산'을 보고 나온 날, 나는 숙연했다. 아니 처연했다. `학익진'의 위대한 병법과 거북선의 놀라운 창조와 파괴, 당시의 지정학적 통찰력 등 충무공의 탁월한 능력은 숙연했으나, 나는 전함의 맨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노를 저으며 명령이 원하는 대로 배를 움직이는 백성의 굵지만 슬픈 팔뚝의 힘줄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속 문장의 기억을 소환한다. “인류 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칼 세이건의 일갈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간절한 팔뚝에 위로와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 `한산'은 나를 처연하게 한다.

나흘간의 추석 연휴는 대체로 평범했다. 왕래는 자유로웠으나 사람들은 신중했고, 날카로운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지 않으면서 숨고 숨기는 일에 골몰했다. 휴일이 아무리 길어도 사람들은 이미 머무는 시간 대신 서둘러 떠나는 일에 익숙한 듯하다. 정체가 뻔한 고속도로의 차량 행렬에 끼지 못할까 전전긍긍 조바심을 지우지 못한다.

덕분에 나는 아주 잠깐 복작거렸던 설렘을 묻어둔 긴 산책의 시간이 호젓하다.

“사실 인간의 정착과 문명을 초래한 것은 잡초였다. 초창기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고 꺾꽂이를 해놓고 몇 달 뒤 돌아와 보니 밭에 자라나 있는 것은 수확할 작물이 아니라 잡초였다.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끊임없이 잡초를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농업경제학자 존 카디너의 책 `미움받는 식물들'을 읽으면서 `해골의 물'을 마신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은 영화의 처연함과 그 속내가 맞닿아 있다.

가족들이 제각각 일상을 찾아 서둘러 떠나고 홀로 남은 긴 연휴가 쓸쓸하거나 외롭다는 느낌은 더는 당연하지 않다. 수렵과 채집을 위해 떠돌이 생활을 했던 원시 인류가 농경하면서 정주(定住)가 시도됐고, 인류세가 도구를 이용해 흙에 손을 대면서 비롯됐다는 것은 정설이다.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쳤다고 정의되는 지질학적 시기를 말한다. 우리는 지금껏 인류세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즉, 인류의 생명 유지와 연장에 필요한 아주 적은 종류의 식물에 국한하는 사고를 유지해왔다. 역사가 철저하게 승자의 기록이었다는 지배 세력의 견해는 지극히 온당한 것이었고, 보통 사람의 생명과 희생이 찬양되는 일은 거의 없다.

연휴 동안 매일매일 걸었던 냇가와 숲길, 그리고 들길과 인공의 도로에 이르기까지 나와 마주친 것들은 대부분 잡초다. 정북토성 들판의 익어가는 벼와 길섶의 호박과 콩, 들깨 등 작물의 풍경은 넉넉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저 무심하게 스쳐 지나는 풀과 나무들은 식량작물보다 훨씬 다양하다. 언제 어느 것이거나 아주 작은 틈도 무시하지 않으며 변함없이 흙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태양빛을 받아내고 반사하면서 환한 세상을 만들고 있음을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다.

유난히 `말'이 실종된 추석 연휴를 보냈다. 안부의 궁금함은 형식이고, 선택에 대한 성찰과 시시비비가 가치와 소용을 상실한 나라와 정치의 불안한 앞날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외면의 시대를 만들고 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은 알곡에 탐내는 승자들의 역사에도, 언제나 잡초는 더 많았고 더 거칠었으며 더 질기게 살아남았다. 때가 되면 들불처럼 타오르는 잡초. 더 많은 모든 보통의 것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잡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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