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완다가
칠완다가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2.08.3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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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학기를 마치고 2주 정도 집에 내진공사가 있었다. 보를 보강하는 공사라 짐을 죄 꺼냈다가 다시 넣는 이사를 해야 했다. 피부가 좀 진정되기도 했고 새 학기도 준비해야 하기에 지난주 내내 집 청소를 하였다. 아이들이 떠난 지 오래지만 혹여 자고 가는 일이 있을까 싶어 정리하지 못하던 두 아이의 침대를 버리고 나니 좁은 집이 꽤 넓어 보였다. 빈 공간에 뭘 할까 하다 소원이던 작은 다실을 꾸며보기로 했다.

돗자리를 깔고 가지고 있던 찻상을 놓았다. 검소한 다기를 사용하라는 선생님 말씀 따라 저렴하고 기능 좋은 다구를 사둔 것이 생각나 그것들도 꺼냈다. 묵은 차는 먹을 만큼 꺼내어 한 번 더 덖으니 배틀한 향이며 맛이 여전히 일품이었다. 빗소리 들으며 마시는 뜨거운 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차를 처음 만난 것은 박사과정을 시작하던 무렵 겨울이었다. 다도를 하시는 할머니가 있다며 같이 가자는 지인의 권유를 몇 번 거절하다 마지못해 따라간 것이 그때였다. 단아하고 소박한 선생님의 모습과 아주 연한 연둣빛 차의 빛깔을 너무 고와, 한 번 그 만남에서 차에 푹 빠졌다. 매주 금요일 오전은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아예 빼두었음은 물론 공부하다 힘들거나 마음의 짐이 있을 때 언제나 선생님의 다실을 찾았다. 청매가 피면 매화 향기 따라 만나고, 달이 좋으면 월토차의 밤으로 만나고, 눈이 오면 눈 녹인 물에 차 마시러 만나고…. 차를 마실 핑계는 끝도 없이 많았다. 밤을 새워 길어지는 찻자리에서 선생님은 당대(唐代) 시인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碗茶歌)를 종종 읊조리셨다.



첫째 잔은 목구멍과 입술을 촉촉하게 하고

둘째 잔은 근심 걱정을 없애주네

셋째 잔은 몸속 깊숙이까지 퍼지니 오, 오천권의 문자가 그 속에 있구나.

넷째 잔에 가벼운 땀이 나더니 한평생 평안치 않았던 일들이 모두 털구멍으로 빠져 나가네

다섯째 잔은 살과 뼈를 맑게 하고

여섯째 잔은 신선(神仙)의 영혼과 통하게 하네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양 겨드랑이에서 청풍이 솔솔 이는구나

봉래산이 어디에 있는고? 나는 이 청풍을 타고 돌아가고 싶네



밤새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시인의 노래에서처럼 양 겨드랑이에서 청풍이 솔솔 이는 듯 가볍고 신선했다. 밤새 내린 이슬이 차갑게 발목을 스치고 풀벌레가 가만히 우는 처서 즈음, 요맘때가 밤 찻자리의 최적기라 할만했다. 그래서 그럴까? 찬바람이 불고 가을 풀벌레가 울면 유난히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

특히 선생님과 마시던 연꽃차가 그립다. 뜨는 해를 따라 연꽃이 피면 연꽃 속에 차를 두서너 숟가락 넣어둔다. 해가 지고 연꽃이 꽃잎을 오므리면 넣어둔 차도 자연스럽게 연꽃 속에 갇힌다. 저녁내 그리 두었다가 자정 즈음 연꽃째 차를 우리면 차향에 연꽃 향이 배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연꽃 피는 것도 보기 힘든 도시에선 꿈도 못 꿀 일이기에 더 연꽃차가 아쉽다. 연꽃차 마시는 밤에 선생님은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난다'는 말을 꼭 덧붙이셨다. 향기로운 연꽃차 한 잔에도 제자를 향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던 게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더위가 가셔서 그런가, 2학기 느낌이 물씬 난다. 찬바람이 불고 따끈한 차가 그리우니 차 한 잔 두고도 지혜를 건네려 하신 선생님도 함께 그립다. 또한, 나 역시 마주 대하는 학생들에게 그리하고 있는지 점검하게 된다. 좋은 학생 되기도 어렵지만 좋은 선생 되는 건 정말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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