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일지2
전원 일지2
  • 반영호 시인
  • 승인 2022.08.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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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반영호 시인
반영호 시인

 

알람시계가 필요치 않겠다/늙어갈수록 자꾸 잠이 없다 하더니만/다섯 시에 맞춰놓은 자명종 보다 일찍 일어났다/새벽부터 하릴없이 멀뚱거리기 싫어서는 아니다/밤새 비워둔 텃밭이 궁금해서다/나 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깨운 농작물들/밤새 안녕하신가 눈인사를 나누며/고랑을 따라 한 바퀴 빙 돌아본다/밤손님이 다녀갔나 보다. 누구겠는가/고구마 땅콩을 파헤친 건 멧돼지 너구리/무 배추 상추 뜯은 건 고라니 토끼/이 아침 내 눈을 피해 잘 여문 알곡을 노리는 새떼들도 보인다/농작물은 주인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단다/어제보다 오늘 부쩍 자란 작물들/한 바퀴 텃밭을 돌고나니 땀이 범벅이다
시기를 놓쳤지만 늦게나마 참깨부터 베어야할 것 같아 부랴부랴 낫을 들고 나갔다. 인기척에 참새 떼와 비둘기들이 우루루 날아간다. 허수아비를 세우고 독수리 연을 띄워 놓았는데도 새들은 무서움도 없는지 조류 퇴치를 위한 위장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깨 대를 건들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작은 알곡은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를 뿐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비 맞은 중 담 모퉁이 돌아가 듯 알아듣지 도 못할 작은 소리로 불평 섞인 말을 중얼 거렸다.
참깨 알이 꼭 이 모양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이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모르겠지만 외부기생성인 흡혈해충으로 어릴 적 꽤나 괴로움을 겪었다. 이가 몸에서 기생하면 보통 이 이고, 머리에 기생하면 머리이라고 했다. 가려워 긁으면 두드러기나 피부염을 일으키고 습진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더욱이 만연되면 발진티푸스, 회귀열 등의 전염병을 매개한다. 이 는 의복의 주름 잡힌 곳이나 재봉 선에 많이 꼬였는데 노인들이 담벼락에 기대 앉아 옷을 벗고 이를 잡는 모습을 종종 보았었다.
폭염 경보가 내려진 날. 한 여름의 뙤약볕이 강렬히 내려 쬐는데 습한 날씨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그렇다고 참깨 벼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햇볕의 노출을 최소화 하기 위해 썬 크림을 바르고, 가볍고 시원하다는 채양 큰 맥고모자를 썼지만 강한 자외선과 타는 더위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다. 이럴 때 자칫 열사병인지 일사병인지에 쓰러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비 맞은 듯 흐르는 비지땀을 연실 훔치며 버텨본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지 오래다.
그런 중에 밭가에 핀 쪽도리꽃을 발견하였다. 원줄기 총상꽃차례에 홍자색으로 달린 풍접초라고도 부르는데 수술 4개로 꽃잎보다 서너 배 길고 암술은 한 개다. 참 반갑다. 육십 여 년 전 큰 누님이 시집갈 때 쪽도리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확히 족두리가 맞는 말이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시집가는 날 눈이 오면 부자가 된다며 온가족들은 무척 좋아 하였다. 그것도 서울로 시집을 가니 얼마나 신이 났던지….
기대와는 달리 누님은 시집살이가 여간 아니셨다. 시집은 칠남매 형제를 둔 가난한 집이었다. 형제는 많으나 직장을 갖거나 돈벌이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매형님은 돈 벌기 위해 월남(현 베트남)파월기술자로 나가 일하다가 웃날 중동으로 옮겨 다니시며 집안을 일으키셨다. 6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참으로 못사는 나라였는데 젊은이들이 해외에 나가 피땀 흘려 벌어온 돈은 나라 발전에 종잣돈이 되었고, 지금 경제규모 10위권에 든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어려웠던 시절의 우리를 뒤돌아보게 된다.
그런 누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전 올라가 뵈었다. 누님 연세 여든 여섯. 적잖은 나이인건 아는데 폐암 4기라니. 매형은 해외근로자로 외국으로만 전전하시다가 나이 쉰에 열사의 나라 사우디에서 돌아가신뒤 눈물로 삼 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족두리 쓰고 서울로 시집 가셨던 누님. 어릴 적 그토록 나를 이뻐하셨던…. 아-우리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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