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햄릿' 있는 것과 되는 것
연극 `햄릿' 있는 것과 되는 것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16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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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서울 남산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연극 햄릿을 보았다. 비 때문에 비통한 시절에 연극을 보겠다는 용기는 딸내미 덕분이었다. 이젠 제법 밥벌이를 한다고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할 수 있도록 선물로 티켓을 마련한 것이나, 출연 배우들의 면면이 놓칠 수 없는 `꿈'같은 것, 그 날이 공연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점이 망설일 틈을 용납하지 않았다.

햄릿의 출연 배우들의 연기경력을 합치면 500년을 훌쩍 넘는다. 81세의 권성덕과 전무송을 비롯해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길해연 등 쟁쟁한 대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일은 더 이상 쉽지 않을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400여년 전 세익스피어의 대사 한 줄만으로도 `햄릿'의 줄거리를 다시 설명하는 수고는 쓸모없는 일이다. 다만 `햄릿'이 죽음으로 치닫는 비극의 결말을 향하면서 삶의 본질적 문제와 인간의 욕망과 음모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고전의 가치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래, 연극이다. 연극을 하는 거다. 연극으로, 그 자의 양심을 틀어쥐는 거다.” 극중 `햄릿'(강필석 분)은 극중극을 통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어머니를 가로 챈 클로디어스(유인촌 분)의 탐욕을 고발하는 장치로 삼는다. 세상의 모든 `사는 것'이 연극과 다를 바 없고, 특히 모든 거짓과 음모로부터 비롯되는 권력과 사랑에 대한 탐욕 또한 잘 짜여진 연극에 불과하다는 각성을 극중극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이번 <햄릿>에서 이런 자극은 대부분 50년을 훌쩍 넘긴 쟁쟁한 대배우들에 의해 자극된다. 단 한 사람도 한국 연극의 대표 배우로 손꼽는데 주저할 수 없는 주연급 배우들이 무덤파기(권성덕), 유령(전무송), 배우1(박정자), 배우2(손숙), 배우3(윤석화), 배우4(손봉숙) 등 단역으로 출연해 극의 흐름을 주도하고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 상징으로서의 무게를 든든히 한다. 선과 악의 대립 구도에서 부정적 측면의 서사를 지탱하는 클로디어스(유인촌), 거투르드(김성녀), 플로니어스(정동환) 등 저력있는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으나, 주인공인 `햄릿'(강필석)과 그의 비극적 연인 오필리어(박지연) 등 주연급은 젊은 배우들로 캐스팅되었다는 점은 특히 눈길을 끈다.

35년 동안 연극 `햄릿'의 주인공을 6번이나 한 유인촌이 첫 악역을 맡은 것과 처음으로 `햄릿'의 주인공이 된 강필석의 만남은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의 공진화된 충돌로 여겨질 만큼 파격적으로 신선하다.

사정이야 다르겠으나 세상 사는 누구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숙부의 아내가 된 어머니의 치정 혹은 강요된 선택에서 복수와 진실의 폭로를 두고 망설이는 `햄릿'과 같은 고뇌 번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런 탐욕과 찬탈의 음모를 완벽에 가까운 객관적 시각과 연극적 행위로 진실에 접근하는 문을 열어젖힌 관록의 극중극 배우들의 고발은 세상의 모순을 미리 알면서 도덕과 질서를 존중하는 `지금/여기'에서의 어르신들의 일탈에 대한 갈증에 가깝다.

햄릿은 비극적인 운명에 저항하는 영혼의 모험이다. 죽음이 유령의 모습으로 찾아와서 진실을 들려준다.

“To be, or not to be”에서 `있음'과 `존재'의 사이에서 비틀대는 `햄릿'의 숙명이 be라면, 무대의 정중앙을 분할, 차지하면서 등불을 밝힌 배우 1,2,3,4는 뭔가 있는 것으로 예고되는 being으로의 거듭남과 더불어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되는 것'(becoming)으로의 공진화에 대한 소망이다.

유령으로부터 진실을 알게 된 `햄릿'이 외치는 대사는 “아, 뒤틀린 세상.” 원문은 `Time is out of joint', 즉 `시간의 흐름을 채운 빗장이 풀렸다'는 뜻이다. 햄릿이 사는 삶의 시간과 유령이 사는 죽음의 시간이 빗장 풀린 문 사이로 들어가 섞이는 무대는 `익숙함'과 `새로움', 관록과 패기의 조화를 통해 세대와 세대가 어우러지는 환상을 기대하게 한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고, 맨 위와 맨 앞을 언제나 오로지 나 혼자만 독점할 수 없다. `햄릿'을 통해 `지금/여기'의 세상을 본다. 그리고 참과 거짓, 나이 듦과 젊음의 선명한 `몫'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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